영화 ‘하류인생’. 동아일보 자료사진
《임권택 감독의 99번째 영화 ‘하류인생’은 195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까지의 굴곡진 우리 현대사를 온몸으로 부대끼며 살아온 한 남자의 삶을 다룬 작품이다. 9월 개막되는 제61회 베니스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한 ‘하류생’과 임 감독에 대해 남완석 교수(전주 우석대 영화학과)와 심영섭씨(영화평론가) 부부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완석=임 감독이 99번째 영화를 통해 자신이 걸어온 영화인생과 삶의 여정을 개인적으로 돌이켜본 것에 이 작품의 의의가 있다고 생각해. 어깨에 힘들어간 영화가 아니라, 60년대 자신이 했던 장르적 특성이 강한 영화를 만들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어.
△심영섭=난 임 감독이 왜 어떤 한 시기, 57년부터 76년까지의 근 20년을 선택했을까 생각해 봤어. 그건 그 시기에 임 감독이 숱한 영화를 만들었지만 단 한 번도 그 시대를 제대로 그려낼 수 없었기 때문에 이제라도 그 시대를 말하고 싶은 욕망이 있었던 것 같아.
영화에서 임 감독은 탁류에 휩쓸린 거대한 인간군상의 모자이크 벽화를 그리고 싶어 하지. 전체 컷만 186컷을 헤아려. 마지막 크레딧에 오르는 등장인물만 해도 100명이 넘어. 한 마디로 숨 가쁘고, 어떤 인물에게도 충분한 시선이 가지 못했어.
남완석
△남=난 영화 전체가 임 감독이 영화로 만든 사진첩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 이 작품을 한 편의 앨범처럼 한국의 현대사에 헌정했다고 생각하면 부정적으로만 볼 건 아니지.
△심=내가 보기엔 더 큰 그림을 그리려 하다가 실패한 것 같아. 이 영화에서는 역사와 인물이 제대로 침투되어 있지 않아. 주마간산 식으로 그저 역사를 훑어 내리는 느낌만 받았어.
심영섭
△남=그 점에 대해선 난 다르게 생각해. 지금까지 임 감독의 많은 영화에서 역사적 인물이 등장했잖아. ‘태백산맥’ ‘취화선’ 등 역사적으로 공인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단 말이지. 그 이전에 찍은 영화 ‘티켓’ 등에서는 역사와 상관없는 민초가 주인공이었잖아. 옛날 영화들을 이 영화와 연결시켜보면 궁극적으로 감독은 평범한 사람들의 삶과 역사가 나란히 진행되는 것을 보여주려 했던 것 같아. 주인공 태웅은 무슨 일이 생겨도 하류인생을 계속 살지. 역사의 도도한 흐름과 개인의 삶에 어떤 교차점이 있기보다 평행선으로 가는 걸 이야기하려 한 것은 아닐까.
△심=그건 그렇고 ‘서편제’ 이후 임 감독의 영화는 미장센(화면 짜기)의 미학을 보여줬어. 그런데 이번 영화에선 그런 아름다움이 사라진 자리에 몽타주만 남은 것 같아. 그런데 몽타주가 너무 급해. 영화를 보면 가속도가 붙어 뒤돌아보는데도, 성찰이라든가 감정이 실리지 못했어. 그런 것 때문에 감독과 관객의 거리가 서서히 멀어지는 것 아닌가 하는 걱정도 들고….
△남=나도 그 점에는 동의해. 관객들의 감정이입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부분이 부족해. 특히 편집에 완급이 거의 없어.
△심=왜 플래시백(과거장면)은 사용하지 않았을까. 이전에는 액자구조(이야기 속의 이야기)나 플래시백을 많이 사용했잖아.
△남=그건 당신이 이야기 한 것처럼, 그 시대의 삶이 자신을 뒤돌아보고 성찰하는 삶이 아니었다, 그저 앞만 보고 내딛는 삶이었다, 그러니 플래시백이 등장할 여지가 없었다고 설명할 수도 있어.
△심=주제 전달방식에서 문어체적 대사에 의존하는 점도 아쉬워. 여주인공 혜옥이 “조폭과 권력은 본질적으로 같은 거다”, 이런 얘기를 하잖아. 조폭은 외양과 내면이 동일한데 권력은 위선적 태도를 취하기 때문에 더 악하다, 뭐 그런 식의 분석이 나오는데 너무 직설적이야.
△남=출산 장면도 그렇지. 정신없이 빠르게 진행하다 이 장면을 클로즈업으로 오래 보여주지. 애 낳는 고통을 보여주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의미를 태웅의 대사로 설명하잖아. 문자적 상상력이라고 할까. 하지만 그것조차도 이젠 희귀한 전통이야. 특히 액션 영화라는 시각에서 보면 평가할 만한 부분이 많아. 태웅이 극장 앞에서 패싸움 하는 장면을 보면 다른 액션 영화처럼 유려하지 않고 거칠지만 힘차게 보여.
△심=그게 감독의 진정한 자산이지. 60년대 액션, 흔히 ‘다치마와’라고 부르는 활극을 진정하게 구사할 줄 아는 분이야. 임 감독의 액션 영화 속 남자 주인공들은 사랑을 하면 몸을 다쳐. 영화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내린다’에서 박노식은 사랑하는 여자를 구하기 위해 폭력배의 요구대로 진짜 작두로 자기 팔을 잘라. ‘애꾸눈 박’에서나,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태웅은 다리에 칼이 꽂힌 뒤 여자를 얻잖아. 그런 상황설정이나 액션은 참 반가웠어.
△남=사실 관객들이 흥미롭게 생각하는 부분은 영화 속의 영화를 만들 때의 에피소드잖아.
‘하류인생’ 박혜옥 역의 김민선
△심=맞아. 60년대 충무로를 다시 화면에서 재현하는 쾌감이 있었어. 기본적으로 액션 영화를 찍는 감독의 이야기, 60년대 충무로 얘기를 더 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다른 얘기도 좀 해보자. 난 임 감독이 세트를 안 지었을 때의 80년대 영화가 더 좋아. ‘티켓’ ‘길소뜸’ 같은 영화 말이야. 이번 영화에서는 세트가 너무 인공적이라는 느낌을 준다고. 우리가 살아온 시대가 아니라 세트가 주인공 같은 느낌이야.
△남=이탈리아의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도 그랬지. 네오리얼리즘을 추구하더니 나중에는 바다까지 세트로 만들었잖아. 나이 먹어 가는 감독의 욕망 중 하나인 것 같아. 영화의 모든 것을 통제하고 싶다, 그건 세트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거지. 임 감독이 세트에 집착하는 이유는 당시의 모습을 완벽하게 재현하고 싶은 욕망 때문인 것 같아.
△심=시대의 공기를 잡는다는 게 무엇일까를 다시 생각하게 돼. 이 영화는 50, 60년대 공기를 잡아내는데 실패한 것 같아. 비단결 같은 세트와 촬영이 오히려 해가 됐다고 봐.
△남=물론 사람들의 큰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측면도 있지만 이 작품이 감독의 마지막 영화는 아니잖아. 오리엔탈리즘을 자극하는 고급영화를 만들려는 압박에서 벗어나는 징후들은 긍정적이라고 봐.
△심=임 감독의 영화에서 신기한 점은 그저 그렇게 가다가도 늘 결정적 한 방이 있다는 거야. ‘서편제’에서도 그 유명한 롱 테이크(길게 찍기) 장면이 있잖아. 이번 영화의 한 방은 마지막에 나오는 소리의 몽타주들인 것 같아. 최류탄 소리와 태웅의 주먹 소리가 몽타주 되면서 모든 것이 한데 뒤섞이는 마지막 장면은 정말 압권이지. 난 솔직히 임 감독의 100번째 영화가 역사나 한국적 소재를 다룬 영화가 아니었으면 좋겠어.
△남=난 100번째 영화에서는 한국영화의 역사를 증언하는 한국판 ‘시네마 천국’ 같은 영화를 해 주셨으면 좋겠어. 그래서 ‘하류인생’에 특별 출연한 영화계 인사들이 다시 대거 등장하는 영화계의 사진첩을 보고 싶어.
△심=볼 수 있을까. 보길 원해.
정리=고미석기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