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우디아라비아에서 발생한 인질 테러 여파로 미국 서부 텍사스 중질유(WTI)가 또다시 사상 최고가를 기록하는 등 국제 석유시장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중동지역 분쟁이 석유 생산시설에 대한 테러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우려가 일면서 수급 불균형이라는 ‘악성 시나리오’마저 거론되고 있다.
▽테러에 짓눌린 석유시장=진정 기미를 보이던 유가가 다시 폭등한 표면적인 이유는 지난달 29일 사우디에서 일어난 테러 때문. 테러가 발생한 호바르 일대는 석유 관련 설비는 없지만 서방 석유회사들의 사무실과 숙소가 있는 곳이다.
이에 따라 국제 석유시장에서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테러 대상이 사우디의 석유 생산시설이나 수출시설로 옮겨갈 수 있다는 불안이 증폭되고 있다.
미국 뉴욕 타임스는 2일 석유전문가의 분석을 인용해 “사우디에서의 추가 테러 우려가 배럴당 5달러, 이라크전쟁이 4달러, 베네수엘라 정정불안 3달러, 나이지리아 내정문제가 1달러씩 유가를 올려놓고 있다”고 보도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도 최근 “‘석유은행’인 사우디의 수출이 어려워지면 1979년 이란혁명으로 세계 석유공급이 7% 줄면서 유가가 배럴당 75∼80달러(현재가치 기준)까지 치솟았던 상황이 재연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미국이 7억배럴 규모의 전략비축유를 확보중인 데다 중국도 유사시를 대비한 석유 매집에 나서고 있는 점도 유가를 부추기는 요인이다.
여기에 6월부터 시작되는 미국의 ‘드라이빙 시즌’도 휘발유 수요 증가에 따른 유가 상승으로 이어지고 있다.
현재 석유시장을 안정시킬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대안은 3일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열리는 석유수출국기구(OPEC) 총회에서 증산(增産) 결정이 내려지는 것. 하지만 실질적인 증산 능력을 갖춘 곳은 추가 테러 가능성에 노출된 사우디뿐이다.
▽한국 경제, 고유가 부담 가시화=유가 상승에 따른 한국 경제의 부담은 이미 현실화되고 있다.
지난달 20일까지 한국의 원자재 수입 증가율(작년 동기 대비)은 44.3%로 올해 최고치를 기록했다. 특히 원유는 물량 기준으로는 2.4% 증가에 그쳤지만 도입 단가가 30.9%나 높아져 총 수입액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4%나 늘었다.
현대증권도 2일 보고서를 통해 올해 4·4분기(10∼12월)부터 고(高)유가가 수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내다봤다.
에너지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중동산 두바이유의 연평균 가격이 배럴당 35달러에 이르면 한국의 경제성장률은 3%포인트 가까이 감소한다.
고기정기자 koh@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