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년 전 서울 강남성모병원 자원봉사자들 사이에서 주부 허정희씨(49·서울 서초구 반포동)의 별명은 ‘수도꼭지’로 통했다. 중환자실 환자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들을 때마다 펑펑 울었기 때문.
“젊은 환자들을 보면 그 젊음이 아까워서 울었고, 나이 든 아주머니들을 보면 애들을 두고 가야 하는 그 마음이 너무 안타까워서 눈물을 흘렸죠. 노인분들은 평생 고생하시다가 병석에서 떠나시는 모습이 딱해서 울었고….”
이제는 마음을 달랠 줄 아는 어엿한 ‘고참’ 봉사자가 됐지만 그를 거쳐 간 환자들을 회상하는 허씨의 눈가에는 다시 이슬이 맺혔다.
허씨가 강남성모병원과 인연을 맺은 것은 1990년. 동네 아주머니의 권유로 병실 봉사활동에 참여해 암을 앓고 있는 한 가난한 새댁을 만난 것이 시작이었다.
“입 안이 헐어서 아무것도 못 먹고 배고파하는 모습이 너무 안타까웠어요. 그래서 집에 있던 사골 국물을 가져다 주고, 죽을 끓여다 주면서 인연을 맺게 됐죠.”
얼마 후 그 젊은 여성은 세상을 떠났지만 허씨는 그가 고마워하는 모습을 통해 ‘다른 사람을 위해 음식을 준비하고 남에게 뭔가를 주는 것의 기쁨‘을 배우게 됐다.
이후 15년, 허씨는 매주 화요일 오전이면 병원을 찾아 환자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 움직일 수 없는 환자의 몸 구석구석을 닦아주고, 머리를 감겨 준다. 죽음을 앞두고 병마와 싸우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그들의 팔다리를 주물러 준다.
“제가 한 수고보다 더 큰 보상을 받았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더욱 사랑하게 되고, 행복이 뭔지 깨닫게 됐거든요.”
특히 당뇨 합병증으로 두 눈이 보이지 않던 한 젊은 여성은 그에게 삶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준 ‘큰 스승’이었다. 그에게 봄날의 목련, 가을의 단풍 등의 풍경을 일일이 말로 설명해 주면서 새삼 주변의 사소한 정경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게 됐던 것.
그는 “병원에서 인생에 ‘다음’이라는 것은 없다는 것을 배웠다”면서 “나중에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소홀히 하면 반드시 회한이 남는다”고 말했다. 환자들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애쓰지만 그들이 눈을 감고 나면 항상 “좀 더 잘해줄 걸…”이라는 아쉬움이 남아 마음이 아프다.
그래서 의사인 남편과 군대에 가 있는 두 아들과도 한 순간 한 순간 더 많은 사랑을 나누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
“많은 사람들을 떠나보내다 보니 가족들이 옆에 있어 주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저 건강한 것만으로 고맙고, 요구가 줄어들어 더 행복했죠.”
그는 “수많은 봉사자들에 비하면 나는 ‘중닭’수준”이라며 “누구나 마음만 있고 일주일에 반나절의 시간만 낼 수 있다면 자신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정말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샘에서 물을 퍼낼수록 맑은 샘물이 솟아나듯 봉사를 하면 할수록 마음이 풍요로워집니다.” 허씨의 얼굴에 고운 미소가 번졌다.
전지원기자 podrag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