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에게 중국에 대한 첫 인지는 6·25전쟁 때 중공군이었다. 1951년 1·4후퇴로 피란 가다가 중공군에게 추격당했다. 그들의 출현은 피리소리로 다가왔다. 심리전이라는 말도 처음 들었고 피리소리가 그렇게 무섭다는 것을 그때 비로소 알았다. 공포의 밤을 지새우고 정작 우리 앞에 나타난 중공군은 군복에 흰 망토 같은 천을 두른 무뚝뚝한 사람들로 기억된다. 흰옷은 미군 폭격에 대비한 보호색이라 했다.
다음은 ‘때국놈’이라는 중국인에 대한 욕설에 관한 의문이다. 욕심 많고 경우 바르지 못한 사람에겐 ‘때국놈 같으니’라고 욕하였다. 그 욕의 근원이 무엇인지 참으로 궁금했다. 그 의문은 역사를 공부하고 나서야 풀렸다. 원래의 말은 ‘대국놈’이었다.
▼19세기 청나라, 대원군 납치▼
17세기 명·청이 교체되면서 조선 사회도 극심한 진통을 겪었다. 명나라와 문화적 동질성을 갖고 있던 조선은 명과 동맹관계로 동서진영을 구축하고 있었다. 따라서 중원을 도모하려던 청은 북경에 진격하기 위해 배후에 있던 조선을 선제공격할 필요가 있었고 그 결과는 두 번의 호란으로 나타났다.
병자호란으로 국체의 상징인 국왕 인조가 삼전도에 내려와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은 사실은 엄청난 치욕으로 각인되었고 그 상처받은 자부심의 회복이 조선 사회의 최대 과제로 떠올랐다. 그리하여 청을 쳐서 복수하자는 북벌론(北伐論)이 국가 대의가 되었고 그 과정에서 무력으로 평화적 국제질서를 무너뜨린 군사대국 청을 비하하는 국민정서가 ‘때국놈’이라는 욕설을 낳았던 것이다.
조선 정부의 외교정책은 이 군사대국 청을 어떻게 요리하느냐에 집중됐다. 호란 때 삼학사를 비롯하여 조선 사대부들이 보여준 지조와 자존심, 그리고 순절, 그후 유교문화권의 공동가치를 토대로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주었으나 멸망한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킴으로써 국가간에도 의리와 명분을 지켜야 한다는 의리명분의 강화, 군사대국 청이 주인이 된 동아시아에서 조선이야말로 문화중심국이라는 자부심으로 다져진 정체성의 확립은 결국 청이 조선이라는 나라를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만든 동인이었으며 그것은 조선 당국자들의 만만치 않은 문화역량에 힘입은 것이었다.
그러나 서세동점의 19세기 말 청나라가 서구열강에 밀리는 상황이 되자 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내세우며 군사대국의 본성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임오군란의 책임을 물어 대원군을 납치하고 위안스카이(袁世凱)를 파견하여 조선 내정에 일일이 간섭하고 나섰다. 이에 일본은 청의 속국을 면하려면 독립해야 한다고 부추겨 청과 조선을 이간하는 정책을 썼다.
그로부터 1세기가 경과하고 우리는 그간의 우여곡절을 불문하고 중국과 다시 국교를 맺었다. 정부가 반미친중 외교를 한다고 비판까지 일고 있는 시점에서 중국대사관이 여야 의원들과 당 지도부에 대만 총통 취임식에 불참을 요구했던 사실은 우리에게 충격적이다. 제2의 위안스카이가 나타난 것 같다. 어쩌다가 우리가 벌써 중국의 내정간섭을 받는 수모를 당하게 되었는지 답답할 따름이다.
그보다 1세기 전 중국과 우리의 틈새를 공략했던 일본 제국주의의 망령이 되살아날까 걱정이다. 기다렸다는 듯이 중국의 독주와 오만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한국과 일본이 힘을 합해야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합방해야 한다는 논리가 나오지 말라는 법은 없다. 중국과 일본의 사이에 낀 지정학적 조건은 우리에게 고도의 균형감각을 요구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韓中관계 급할수록 돌아가야▼
우리는 21세기 세계질서가 재편되는 전환기에 처하여 기존의 입장을 정리하고 새로운 방향을 잡아가야 할 고비에 있다. 진행 중인 미국과의 문제도 그 일환일 터이다. 중국과의 관계 설정에서는 초기단계가 중요하다는 점에 유념할 필요가 있다. 우리 속담에 ‘급하면 돌아가라’는 말이 있다. 중국과의 경제협력이 중요하고 의존도가 높을수록 일정한 거리를 두고 천천히 가는 지혜가 아쉽다.
정옥자 서울대 교수·한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