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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프리즘]신지호/김일성보다 박정희가 싫다?

입력 | 2004-06-08 18:38:00


“김일성이 더 나쁘니, 박정희가 더 나쁘니?” 며칠 전 오랜만에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던 옛 운동권 친구에게 대화 도중 던진 질문이다. “박정희가 나쁜 것은 확실히 알겠는데, 김일성은 경험해보지 못해 잘 모르겠다.” 그의 황당한 답변은 나의 인내심을 또다시 시험에 들게 했다. 그 순간 이라크 국민의 인권을 침해할 가능성이 있다며 파병결정을 비판하고는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충분한 정보가 없어 뭐라 말할 수 없다던 국가인권위원회가 불현듯 떠올랐다.

입국 탈북동포 수가 4000명을 넘어선 지 오래다. 성별, 나이, 출신지역, 직업 등을 종합할 때 통계학적 표본으로 충분히 의미 있는 숫자다. 이들의 생생한 증언은 관계당국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무슨 정보가 얼마나 부족해 김일성-김정일 정권에 대한 판단을 유보한다는 것인지 그 신중함에 놀랄 뿐이다.

▼북한정권에 침묵하는 진보세력▼

젊은 시절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자신의 삶에 대한 애착 때문에 박정희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을 유지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백보 양보해 경제발전이라는 공적보다 민주주의와 인권 탄압이라는 개발독재의 과오가 훨씬 더 크다 할지라도, 박정희에 대한 혹독한 비판과 김일성에 대한 너그러운 침묵의 공존은 그냥 지나칠 수 없다. 그러한 편향된 역사인식으로는 결코 자유와 번영의 통일 한반도시대를 개척할 수 없기 때문이다.

김일성보다 박정희를 더 싫어하는 사람들, 나는 그들을 외눈박이 역사인식 세력이라 부르고자 한다. 얼마 전 청와대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눈물을 흘린 이들의 정서 또한 이러한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부정의 부정은 긍정이라고, 그들은 자신들이 맞서 싸우던 세력이 싫어하던 북한 정권에 대해 과거에는 호감을, 현재는 침묵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진보적 태도라 이해한다.

그러나 이는 사이비 진보다. 진보(進步)란 본시 미래지향적이어야 한다. 평등을 강조하면 진보, 자유를 강조하면 보수라는 등식은 20세기의 유물이다. 그러한 등식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계획경제를 근간으로 삼던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면서 의미를 상실했다. 아직도 그러한 개념에 사로잡혀 북한 사회주의 체제가 남한 자본주의 체제보다 더 진보적인 체제라고 인식하고 있는 이가 있다면, 그는 21세기를 20세기의 감각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다. 자신이 고생하던 시절의 그 체제가 아무리 밉다 할지라도, 아사자와 정치범 수용소를 대량 생산한 체제의 문제점을 애써 외면하고자 하는 태도는 결코 진보가 아니다. 그것은 진보를 ‘참칭’한 또 다른 수구반동일 뿐이다.

21세기를 맞아 우리 사회가 극복해야 할 수구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현 집권세력이 그토록 미워하던 반공수구냉전 세력이다. 그 온상이라 여겨지던 한나라당은 처절한 정치적 패배를 거듭한 결과, 자유주의 보수세력으로 거듭나려는 진통을 겪고 있다. 성공 여부를 예단할 수는 없으나, 변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는 것 정도는 깨우친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또 다른 수구세력이다. 그 수구는 이른바 진보진영 내에 있다. 김일성보다 박정희를 더 싫어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봉건 절대왕조의 임금보다 더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수령 독재에 대해서는 둔감하다. 그저 화해협력의 대상으로만 인식할 뿐이다. 이렇듯 아직 한국에는 소비에트 사회주의와 치열한 투쟁을 벌이던 서독의 사민당과 같은 진보세력이 없다. 북한 정권에 대한 이해심이 깊어야 진보라는 허위의식이 존재할 뿐이다.

▼외눈박이 역사인식 극복해야▼

이렇게 볼 때 반공수구와 친북수구의 20세기 수구연합은 일부 파괴되었으나, 여전히 살아있는 부분이 있다. 이 잔존 부분을 걷어내는 작업은 아무래도 21세기 선진화 세력이 담당해야 할 것 같다. 외눈이 아니라 양 눈을 통해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역사인식을 체화시킨 이들이 여럿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민주화 세력 속에서 개명된 이들이 많이 나오기를 학수고대한다.

신지호 서강대 겸임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