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미혼 여성이 이런 걸 발표하는 게 어떨지 모르겠지만…(중략)…이 약으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효과가 최대 36시간까지 계속되기 때문에 한 번 복용하면 주말 내내 사랑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한 여성 발표자가 발기부전 치료제를 판매하는 상황을 가정해 프레젠테이션(PT)을 시작하자 술렁이던 분위기가 갑자기 진지해졌다. 주로 남성으로 이뤄진 심사위원단의 반짝이는 눈빛은 발표자에게 집중됐다.
8일 오전 서울 강남구 논현동 광고대행사 오리콤 7층 회의실. ‘5분간의 생존 게임’이라는 제목으로 사내 PT 경진대회가 한창이다. PT 기술을 향상시키고 사내의 숨은 인재를 발굴하자는 게 이번 행사의 취지. 매일 오전 한 시간씩 일주일에 걸쳐 대리, 차장급 71명 전원이 참가했다.
심사위원석에는 전풍 사장을 필두로 이 회사 간부 모두가 앉아 있다. 사내외에서 수많은 PT를 보고 직접 하기도 했던 백전노장들. 단 5분 동안 이들의 관심을 어떻게 끌 것인가,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 접촉사고로 1000만원 버는 법?
실제 PT에서도 정해진 시간을 지키는 것은 몹시 중요하다. 이번 행사에서도 주어진 5분이 지나면 점수를 깎았다. 이종승기자 urisesang@donga.com
다들 ‘끼’만큼은 누구보다 월등하다고 자부하지만 긴장감을 감출 순 없었다. 발표자들은 한쪽 벽에 일렬로 앉아 입술에 침을 발라가며 발표 자료를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봤다.
천도(遷都) 제안-원봉리(발표자의 고향이 충남 공주시 반포면 원봉리), ‘Fuck’을 이용한 생활영어, 싸움 잘하는 법, 누구나 얼짱 되기, 광고인을 위한 보양식여행 베스트4, 지하식당 120% 활용 전략, 사모님 되는 법(‘士’자 남편 두는 법)….
‘제한이 없다’는 조항 덕분에 발표자들이 들고 나온 소재는 그야말로 다양했다.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이라는 노래를 분석한 김정규 차장은 “삼천궁녀까지 합치면 3100명이 되는 것 아닌가” “왕과 문신 위주이고 이공계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세종대왕 이순신이 빠지고 이완용이나 이수일과 심순애가 들어간 건 무슨 의미인가” 등 날카로운 문제의식으로 좌중의 폭소를 자아냈다. 그는 “아이들도 따라 부르는데 가사에 문제는 없는지, 얼마나 믿어야 하는지 궁금해 이런 작업을 했다”고 설명했다.
지금 자신이 살고 있는 집을 실제로 팔겠다고 나선 경우도 있었다. 서희곤 차장은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에 살고 있는 이 회사 간부들의 사진을 화면에 띄워놓고 ‘과연 행복하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는 “2층 서재에서 모 골프장 18번 홀이 내려다보일 정도로 가까워서 언제든 손쉽게 이용할 수 있다. 부킹만 할 수 있다면”이라며 전원주택의 장점을 내세웠다.
보험회사에 근무했던 이철민 차장은 “자해공갈과 정당한 보상금은 백지 한 장 차이”라며 ‘사소한 접촉 사고로 1000만원 버는 법’을 강의했다.
그는 보상금을 많이 받으려면 “지금 아픈 사람 앞에서 돈 얘기 하세요?”라는 태도를 가지고 △항상 아프다고 하라 △일주일에 한 번은 통원치료를 받으라 △보상 직원이 겁주는 말에 신경 쓰지 마라 △보험개발원이나 금융감독원을 팔라 등의 전문적인 비법을 공개했다.
○ 치밀한 사전 준비
광고회사에서 PT의 중요성은 상상하는 것 이상이다. 광고에 대해 아무리 연구를 많이 하고 좋은 광고를 만들 능력이 있어도 광고주에게 이를 제대로 알리고 설득하지 못하면, 그래서 계약을 따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없다. PT 기술을 향상시키고 선수를 키우는 데 사운이 걸려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 때문에 지난달 초 이번 대회의 개최 소식이 알려진 후 약 3주간 회사 안팎의 분위기는 긴박하게 돌아갔다. 광고회사라고 해도 대리나 차장급은 경쟁 PT의 경험이 거의 없다. 경쟁사와 벌이는 실제 PT는 늘 대표선수가 출전하기 때문이다.
그래픽 디자이너인 진상훈 대리는 “대회 소식을 듣고 눈앞이 캄캄했다”고 털어놓았다. 우선 발표 자료 작성을 위한 파워포인트 프로그램은 날을 따로 잡아 메뉴를 일일이 활용해가며 배워야 했다. ‘아무나 얼짱 되기’라는 제목은 곧 정했지만 논리적으로 구성하고 살을 붙여 발표 자료를 완성하기까지 꼬박 3일이 걸렸다.
PR팀의 손소영 대리는 평소 보도자료 작성하는 게 일. 앞에 나서서 발표를 해본 경험은 물론 파워포인트를 이용해 자료를 만들어본 경험이 거의 없었다. 그는 “발표 자료 작성을 고민하다가 한 커피 전문점에서 메뉴판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소개했다. 연노랑, 연분홍, 파랑…. 그의 기획서는 그때 본 메뉴판의 색깔 구성을 상당 부분 본떴다.
○ “…자! 기도합시다”
이번 대회의 심사 요건은 △아이디어가 얼마나 창의적인가 △주제에 대해 논리 정연하고 설득력이 있는가 △5분을 적절히 배분해서 발표했는가 등 3가지.
일반적으로 PT를 잘하려면 내용도 좋아야 하지만 청중의 관심을 끝까지 잡아두는 게 무척 중요하다. 청중이 지루하다고 느끼는 순간 설득 작업은 물 건너간다.
연극에 출연했던 경험을 소개한 전미정 대리는 심사위원 한 명을 지명한 후 “화면에 나온 문장을 3회 빠른 속도로 반복해 보라”고 주문했다. 그 문장은 ‘시골 찹쌀떡 찰 찹쌀떡’으로 배우들이 발음 훈련할 때 썼던 것. 심사위원은 “눈이 나빠서 잘 안 보이는데…”라고 피해 나갔지만 단번에 청중의 주의를 끌 수 있었다.
발표 자료에는 심사위원단의 좌장인 사장과 부사장의 사진이 단골로 등장했다. 사진 잘 찍히는 법을 소개한 도정윤 차장은 “사진은 평소 모델의 특성을 잘 관찰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운을 뗀 뒤 “사장은 눈을 찡긋 두 번 한 후에, 부사장은 눈가에 경련을 일으킨 후 크게 웃는다”고 말했다.
유머와 막판 반전도 깊은 인상을 남기는 방법 가운데 하나다.
‘행복하시길 원하세요? 하느님을 믿으세요’라는 종교색 짙은 소재를 들고 나온 윤상호 차장은 마지막에 “자, 그럼 기도하시겠습니다”라는 멘트를 날려 심사위원들을 거의 뒤로 자빠지게 했다.
오리콤 대외 경쟁 PT의 절반 이상을 도맡아 하는 고영섭 부사장은 PT를 잘하는 비결을 묻자 “PT 자체를 즐겨야 한다”고 대답했다.
홍석민기자 smhong@donga.com
▼프리젠테이션(PT) 10계명▼
1. PT는 이벤트다. 사전 리허설을 철저히 하라.
2. 장황한 설명보다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라.
3. 글자보다는 그림을 사용하라.
4. 쉬운 말(구어체)을 사용하라.
5. 내용에 따라 목소리의 높낮이를 달리 하라.
6. 청중을 PT에 참여시켜라. 적절한 제스처와 입담, 눈 마주침이 중요하다.
7. 호감을 주기 위해 칭찬으로 시작하라.
8. 무엇을 팔 것인가, 단 한 가지만 남겨라.
9. 반전, 극적 효과를 노려라.
10. 자신감은 최고의 무기, 자신 있게 임하라.
※ 오리콤의 자칭 ‘PT의 달인’들의 의견을 종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