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1▼
남대문시장에 자리 잡은 종합의류매장 ‘메사’ 앞 광장. 젊은 여성 두 명이 벤치에 나란히 걸터앉아 유유자적 담배를 피운다. 인근 사무실에 근무하는 이들은 몰아 피우려는 듯 벌써 두 개비째다. 담배를 피우는 그녀들도, 지나가는 행인들도 피차 익숙한 일인 듯 담담한 표정이다.
▼장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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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굴지의 그룹 계열사 S사의 부서 회식이 열리는 광화문의 한 생고기집. 부서의 홍일점 여성 과장이 회식 중간에 화장실에 가는 척 빠져나와 주차장으로 향한다. 승합차 뒤편에서 두 개비를 연달아 피우곤 화장실에 들러 양치질을 하고 향수를 뿌린 뒤 제자리로 돌아온다.
○ 담배, 피울 자유가 없다
위의 장면 1, 2는 2004년 6월 서울에서 기자가 직접 목격한 풍경이다. 여성 흡연에 관한 한 동시대 같은 공간에 19세기와 21세기가 혼재하고 있다.
한국의 흡연여성은 대체 얼마나 될까? 부정적인 시선을 의식하는 여성들이 흡연 사실을 밝히는 것을 꺼리기 때문에 정확한 통계수치를 알기 어렵다.
1998년 기준 한국 여성의 흡연율은 5.6%(경제협력개발기구 자료)에 불과하지만 흡연자 연령이 점점 낮아지는 추세를 감안하면 그 비율이 상당히 높아졌으리라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특히 남학생들의 흡연증가율은 제자리걸음이거나 둔화되는 추세지만 여학생의 흡연증가율은 가파르게 치솟고 있는 실정이다.
익명의 공간 인터넷에서는 흡연 여성의 증가 추세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대표적인 금연사이트인 금연나라(www.nosmokingnara.org)에는 여성전용 사랑방이 따로 있다. 회원이 늘어나면서 여성만의 방이 생긴 것이다. 올해 들어 여성방은 남성방의 조회수를 몇 배 웃돌 만큼 인기를 누리고 있다. 금연을 시도하는 여성이 늘어났다는 건 흡연 여성층이 그만큼 두꺼워졌음을 말해준다.
○ 누군가 몰래 훔쳐보고 있다
그러나 흡연 여성이 거리에서 눈에 띄는 건 아니다. 그녀들의 흡연은 ‘몰래 흡연’이거나 카페나 술집처럼 익명성이 보장된 장소에서만 피우는 ‘선택적 흡연’인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전업주부들이 담배를 피우는 공간은 대개 승용차, 베란다, 화장실, 부엌, 사우나 등이다. 그 중에는 남들이 상상하기 힘든 공간을 이용하는 이들도 있다.
흡연 7년차인 김정은씨(가명·33)는 “집안에 혼자 있어도 누가 언제 들어올지 몰라서 불안하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다용도실에서 피운다”고 말한다. 창고나 다름없는 곳에서 담배를 피우자면 비참한 생각이 들지만, 그래도 안전한 게 최고라고 그녀는 덧붙인다.
바깥에서 바스락 소리만 나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이웃집에서 자기를 감시하는 것 같다고 호소하는 주부들도 있다.
그녀들이 두려워하는 대상은 남편, 이웃, 자녀, 자녀의 친구 등 전방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단연 시댁 식구가 첫손에 꼽힌다.
흡연 사실을 들킨다는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린다는 주부도 있다. 주부 전진화씨(가명·45)의 경험담. “결혼 생활 18년 동안 (흡연 사실을) 철저하게 숨겨 왔다. 그런데 올해 초 바로 손아래 동서가 흡연자라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동지를 만나 반가웠지만 한편으론 얼마나 허탈했는지 모른다.”
직장에 다니는 여성도 ‘몰래 흡연’을 하기는 마찬가지다. 방송가에서는 한때 ‘치약부대’라는 말이 나돌았다. 시도 때도 없이 여자 화장실에서 칫솔질을 하는 여성 흡연자들을 비꼬는 은어였다.
그나마 방송사나 광고회사, 잡지사 등 여성 비율이 비교적 높고 개방적인 직종에 종사하는 이들은 끽연의 자유를 누리는 편에 속한다. 반면 여직원들의 수가 적고 보수적인 대기업에서 흡연사실을 드러내는 건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대기업만 세 군데나 옮겨 다녔다는 성유진 과장(가명·34)의 증언.
“직장 상사와 도쿄에 출장 갔는데 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는 여자를 보고 인상이 험악해졌다. 만일 우리 회사에 그런 여직원이 있다면 어떡하겠느냐고 물었더니 ‘재수 없는 얘긴 하지도 마라. 화장실에서 몰래 피운다면 몰라도 내 눈 앞에선 절대 용납 못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런 시선을 뻔히 알면서 어떻게 내놓고 피울 수 있겠나?”
○ 담배, 맘대로 끊을 수도 없다
더 큰 문제는 ‘몰래 흡연’이 금연마저 힘들게 한다는 점이다. 주변 사람들과 가족의 지지와 격려 속에 금연을 시도하는 남성들과는 달리 여성들은 전적으로 혼자만의 힘으로, 남몰래 그 지독한 금단현상을 이겨내야 한다.
4월 폐암으로 죽은 탤런트 이미경씨와 이보다 앞서 사망한 코미디 황제 이주일씨의 투병사실에 대한 주변의 반응은 정반대였다.
이주일씨는 금연전도사로 부상한 반면 이미경씨는 골초였다는 사실만 부각됐다. 만약 그녀가 마음 놓고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면, 끊지도 못해 폐암으로 사망까지 했을까.
여자가 담배 피운다고 살벌하게 째려보고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 따귀까지 올려붙이는 일은 요즘 들어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차별과 억압은 더 은밀하고 교묘하다. 당사자들은 그런 억압을 내면화해 자신을 길들인다.
음주단속에 걸린 한 흡연 여성은 경관에게 “저, 안 피웠는데요”라고 앞질러 엉뚱한 변명을 했다고 고백했다. 여성들의 흡연 강박관념은 그만큼 심각하다.
혈액이 흐르는 모든 장기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친다는 담배. 유일한 미덕이 있다면 긴장을 완화시키고 순간이나마 느긋한 기분에 빠져들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의 여성에게 담배는 또 다른 족쇄이자 21세기에도 그 빛이 바래지 않는 ‘주홍글씨’다.
서명숙 전 시사저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