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중국-러시아의 국경이 접하는 러시아 최남단 도시 하산. 낯선 동양인이 역에 내리자 국경수비대원들이 사무실로 연행해 여권을 확인하고 방문목적을 묻는다. “관광”이라고 대답하자 그들이 고개를 갸웃한다. 별 일도 다 있다는 표정이다. “군사시설이 있기 때문에 관광객도 사진 촬영은 안돼요.” 통역을 맡은 고려인 A씨가 거듭 주의를 준다. 마침 하산역을 출발해 두만강 철교(조-러 친선교)를 건너는 열차가 눈에 들어온다. 일주일에 두 차례 북한과 러시아를 오가는 열차라고 한다.》
●67년 전에 멈춰선 녹둔도 시계
하산역에서 남쪽으로 2km쯤 떨어진 곳에 이르자 A씨가 긴장한다. “더 이상 들어가면 러시아 국경수비대에 체포됩니다.” 그러면서 그는 녹둔도(鹿屯島)로 들어가는 소로를 가리켰다. 취재기간 중 만난 러시아과학원 태평양지리연구소 세르게이 간지 부소장은 “우리도 두만강 하구로 들어가는 허가를 받으려면 꼬박 두 달이 걸린다”고 했다.
녹둔도는 가을엔 무성한 갈대숲이, 여름엔 습지성 식물이 주인노릇을 할 뿐이다. 1937년 옛 소련의 스탈린 치하에서 이곳에 살던 한인(韓人)들이 중앙아시아로 쫓겨 가면서 이곳은 하루아침에 버려진 땅이 되고 말았다.
녹둔도엔 지금도 망국의 한이 서린 한인들의 자취가 곳곳에 남아 있다. 녹둔토성 추정지 부근엔 밭이랑이 뚜렷하고 주인을 잃은 집터와 연자방아가 곳곳에 널려 있다. 가마솥 놋그릇 항아리 파편들도 눈에 띈다. 녹둔도의 시계는 아직도 67년 전에 멈춰 있다.
●여의도의 4배가량 되는 녹둔도
녹둔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에서 찾을 수 있다. 사차마도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녹둔도라는 이름을 얻는 것은 세조 원년인 1445년. 이후 만들어진 대부분의 고지도는 녹둔도를 명기하고 있다. 청(淸)나라와 일제가 만든 지도와 기록도 마찬가지다.
녹둔도의 크기는 고지도마다 다르다. 19세기말 조선에서 편찬된 아국여지도의 녹둔도는 무려 남북 70리, 동서 30리에 이른다. 면적이 300km²가 넘는 셈. 반면 1901년 일제가 펴낸 조선개화사는 녹둔도의 면적을 4km² 정도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연구팀을 이끌고 5차례 녹둔도를 현지 답사한 서울대 이기석 교수는 녹둔도의 면적을 32km²로 정도로 추정했다.
●충무공의 자취가 서린 녹둔도
녹둔도는 조선 초 세종의 6진 개척 때 우리 영토로 편입됐다. 세조는 여진족들의 약탈을 우려해 국경수비군에게 엄중 방비하라는 영을 내리기도 한다. 여진족과의 긴장관계는 ‘녹둔도 사건’으로 비화한다. 임진왜란 발발 5년 전인 1587년 여진족들이 대거 침입한 것이다.
조선 군사 11명이 살해되고 백성 160여명이 납치된 책임을 지고 충무공 이순신은 조산만호직을 박탈당한다. 조선은 이듬해 반격에 나선다. 이순신은 이 전투에 백의종군해 승리를 이끈 공로로 사면을 받는다.
녹둔도는 그 이후 19세기 후반까지 역사에서 자취를 감춘다. 이 시기는 청나라와 조선이 접경지역을 무인지대(無人地帶)로 봉금했던 때와 일치한다. 하지만 노계현 전 방송통신대 교수는 “그 시기에도 녹둔도가 조선의 영토였던 것은 분명하다”고 설명했다.
녹둔도는 조선시대 초부터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때까지 한인들의 생활 근거지였다. 지금은 육지와 붙은 녹둔도 추정지 곳곳에서 연자맷돌과 집터 등 한인들의 생활 흔적이 발견된다. 러시아는 옛 녹둔도 주변의 두만강 하구를 군사지역으로 정해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사진제공 두만강토지이용연구팀
●지형변화로 ‘섬 아닌 섬’이 되다
문제는 두만강의 잦은 범람으로 인한 토사의 퇴적으로 녹둔도 북쪽의 물줄기가 차츰 가늘어져 언제부터인가 녹둔도와 연해주가 이어진 것. 동해의 수위 변화도 두만강 수로 변화의 한 요인이 됐다.
1709년 청나라 강희제의 지시로 만든 지도에 이미 녹둔도와 연해주는 붙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잇다. 고종 때 제작된 듯한 경흥읍지의 녹둔도도 그렇게 돼 있다. 따라서 15세기 당시 녹둔도의 위치를 특정하기는 쉽지 않다.
다만 최근 발견된 녹둔토성 추정지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높이 6∼7m, 길이 4km의 토축물은 함경도 조산에서 4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에 따라 녹둔도와 연해주를 갈랐을 두만강 지류(일명 녹둔강)의 위치도 추정할 수 있게 됐다. 이기석 교수는 “녹둔도 추정지에서 둔전을 설치할 수 있을 만큼의 넓은 경지를 확인했다”고 밝혔다.
●淸 원세개 “淸-러조약 불합리” 인정
지형변화로 연해주와 붙어버리긴 했지만 녹둔도는 여전히 조선의 땅이었다. 그러나 러시아가 청나라를 압박해 1860년 베이징(北京)조약을 체결하면서 녹둔도의 운명이 바뀌었다. 러시아가 슬그머니 녹둔도를 자국 영토에 편입시킨 것이다.
당시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조선의 대응은 미미했다. 양태진 동아시아영토문제연구소장은 “조선은 러시아와 청나라가 두만강 하구에 국경표석을 세운 의미를 확실히 알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조선은 뒤늦게 1885년 청나라와 러시아에 3국의 공동 감계안(勘界案)을 제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러시아의 야심과 청나라의 무성의에 조선은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청국관리의 지리적 미숙으로 불합리한 약서를 만들어 조선에 탄식을 끼치게 했다.” 원세개 청나라 공사의 이 말은 조선의 비극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래도 녹둔도는 조선사람 땅
베이징조약 체결 이후에도 녹둔도는 엄연히 조선사람들의 땅이었다. 1883년 어윤중 서북경략사는 “녹둔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조선사람들이고 다른 나라 사람들은 한 명도 없다”고 조정에 보고했다.
고종은 또 김광훈과 신선욱을 밀사로 파견해 녹둔도 현황을 파악하도록 하기도 했다. 이들은 녹둔도에 113가구, 822명의 조선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내용을 아국여지도를 새겨 넣었다.
20세기에 들어서선 녹둔도는 나라 잃은 한인들의 근거지였다. 독립운동가 신필수가 1921년 옛 녹둔도인 녹동에 머물면서 남긴 일기에는 한인마을이 40가구에 이른다고 적혀 있다. 세르게이 간지 부소장은 “1930년대까지 녹둔도를 포함한 연해주에 한인 7만여명이 거주했다”고 말했다.
● 북한이 재확인한 ‘녹둔도 비극’
일본 외교문서에는 조선 조정이 줄기차게 녹둔도의 반환을 요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와 관련, 양태진 소장은 “조선이 러시아와 청나라의 국경획정을 수용하지 않았으므로 한-러 간에는 공식적인 국경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1990년 옛 소련과 국경조약을 체결했다. 베이징조약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북한은 결국 녹둔도가 러시아의 영토임을 공식 인정해준 셈이다.
하산=특별취재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