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상 최대의 ‘나라 없는 민족’인 이라크 내 쿠르드족. 이라크 인구의 10∼15%, 약 500만여명에 이르는 쿠르드족의 최대 염원은 국가 건설이다. 3월 초 제정된 임시헌법이 그들의 자치권을 보장하자 ‘독립국 건설’의 꿈에 한껏 부풀어 있었다. 미군에 가장 적극적으로 협력한 대가이기도 했다.
하지만 8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임시헌법을 승인한다’는 조항이 빠진 이라크 결의안을 통과시키면서 쿠르드족의 독립국 기대는 물거품이 될 위기를 맞고 있다.
▽“과도정부 탈퇴하겠다”=과도정부의 안보담당 부총리인 바르함 살레(쿠르드족)는 9일 “유엔 결의안에 쿠르드족의 역할과 지위에 합당한 권한이 명시되지 않으면 안보담당 부총리직을 수행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또 다른 쿠르드족 과도정부 인사인 네스린 베르와리도 “유엔 결의안 때문에 쿠르드족의 미래가 불투명해졌다”며 과도정부 탈퇴 의사를 내비쳤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쿠르드족은 자신들의 자치권 요구가 거부되고 시아파 권한이 계속 커지자 이라크 과도정부를 위협하고 있다”고 9일 보도했다.
이날 이라크인 4명을 다치게 한 팔루자 폭발사건과 수도인 바그다드 북쪽 베이지에서 일어난 송유관 공격사건도 유엔 결의안에 반발해 일어났다고 월스트리트 저널은 분석했다.
▽느긋한 시아파=반면 이라크 최대 종파인 시아파는 안도하는 분위기다. 시아파 최고지도자 알 시스타니가 7일 ‘안보리는 결의안 내용에 임시헌법을 언급하지 말라’는 성명을 낼 정도로 시아파는 결의안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쿠르드족이 독립할 경우 이라크 최대 유전지역을 빼앗길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결의안을 작성한 미국과 영국은 시아파 손을 들어줬다. 이라크 인구의 60%를 차지하는 다수파이고, 과도정부 내 총리, 석유장관 등 주요 요직을 장악한 시아파를 잡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판단한 것.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유엔 결의안 채택 후 “비록 임시헌법 승인 조항은 빠졌지만 결의안에는 연방, 민주 등과 같은 단어가 많이 들어 있다”며 쿠르드족을 위로했다. 이에 대해 쿠르드족인 호샤르 제바리 외무장관은 “비록 임시헌법 승인에는 실패했지만 결의안에는 임시헌법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고 말해 자치권 획득에 대한 희망을 보여 줬다.
박형준기자 love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