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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놀이와 예술’]주사위는 던져졌다

입력 | 2004-06-14 18:29:00

러시아 화가 샤란고비치의 작품.물감을 캔버스 위에 떨어뜨리는 우연성의 예술을 추구한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작가 잭슨 폴록의 작품을 연상시킨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의 얼굴이 드러난다.-사진제공 진중권씨


옛날 인도에 한 임금이 있어, 세 명의 현자(賢者)를 곁에 두고 늘 지혜를 구했다. 어느 날 그가 현자들에게 삶에서 운과 이성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 물었다. 한 현자가 가로되 “운이 가장 중요하여 아무리 똑똑한 이도 운명을 피해 갈 수 없다”고 했다. 다른 현자는 “중요한 것은 이성이며, 현명한 자는 어떤 불운도 이성으로 극복한다”고 했다. 세 번째 현자는 “운과 이성이 똑같이 중요하다”고 했다.

대답을 들은 왕은 이들에게 각자 제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를 찾아오라고 명했다. 약속한 시간이 지나 세 현자가 왕궁으로 돌아왔다. 삶에서 운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던 현자는 주사위를 증거물로 내놓았다. 이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던 현자는 장기판을 내놓았다. 운과 이성이 똑같이 중요하다고 했던 현자는 주사위를 던져 말을 움직이는 말판놀이를 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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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플라스의 악마

세계는 필연적인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가, 아니면 우연에 따라 진행하는가? 아인슈타인(1879∼1955)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우주의 사건들은 필연적인 법칙으로 연결돼 있어, ‘우연’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칙적으로 인간이 세계의 운행을 남김없이 인식해 그 진로를 예측할 수도 있다는 얘기가 된다.

세계 속의 모든 입자들의 위치와 운동량을 입력해 처리할 수 있는 거대한 두뇌. 근대 과학자들은 이를 ‘라플라스의 악마’라고 불렀다. 그들은 이 슈퍼 두뇌만 있으면 우주의 진행을 완벽하게 예측할 수 있다고 믿었다. 20세기에 들어와 이 낙관주의는 허무하게 무너진다. 하이젠베르크(1901∼1976)의 ‘불확정성원리’는 우주에는 우리에게 ‘우연’으로 주어지는 사건들이 있음을 보여 주었다.

● 십자가 밑의 주사위

지금도 고물상이 많은 서울 인사동에 가면 어린 시절 우리가 갖고 놀던 주사위 놀이 말판을 볼 수 있다. 착한 일을 하면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고, 나쁜 짓을 하면 뱀을 타고 미끄러져 내려온다. 간첩을 신고하고 열심히 공부하면 사다리를 타고, 불장난을 하거나 불량식품을 사먹으면 뱀을 타고 미끄러진다. 이 무지막지하게 교훈적인 놀이로 우리는 미덕을 훈련받았다.

반면 서양에서 주사위 놀이는 주로 악덕과 결부되었다. 왜? ‘도박’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1470년 독일에서 제작된 목판화는 주사위를 들고 방랑하는 야바위꾼을 보여 준다. 그는 눈속임으로 수많은 이들의 주머니를 털었을 게다. 교회도 주사위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성서에 따르면 예수를 못 박은 십자가 밑에서 로마 병정들은 예수의 옷을 차지하려고 주사위 던지기(제비뽑기)를 한다. 여기서 주사위는 ‘죄악’의 표상이 된다.

● 알레아토릭

이게 기독교적 전통이라면 이와 대립되는 전통도 있다. 바로 고대 그리스-로마의 전통이다. 루비콘 강을 건너며 카이사르는 그 유명한 말을 남겼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운명을 거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놀이’를 하겠다는 것이다. 카이사르의 놀이는 ‘위대한 범죄’였다. 그는 주사위를 던졌고, 게임에서 이겨 로마의 황제가 된다. ‘운명’과 더불어 살았던 고대인들에게 삶은 이렇게 놀이, 그것도 아주 위험한 놀이였다.

현대예술도 주사위 놀이를 한다. 다다이즘 미술가 마르셀 뒤샹(1887∼1968)은 1m 길이의 실 세 개를 떨어뜨려 그대로 작품을 삼았다. 초현실주의 조각가이자 시인인 장 아르프(1887∼1966)는 글자가 적힌 종이를 찢어 바닥에 떨어뜨려 얻어지는 낱말의 우연한 조합으로 시를 지었다. 전위예술가 존 케이지는 샘플을 무작위로 배열해 작곡을 했다. 이렇게 창작에 우연을 도입하는 것을 ‘알레아토릭(Aleatorik)’이라 부른다. ‘알레아’는 라틴어로 ‘주사위’라는 뜻이다.

예로부터 철학자들은 우연을 싫어했다. 그들은 우연하게 보이는 현상들 속에서 필연적인 법칙을 발견하려 했다. 철학의 이단아들은 달랐다. 가령 고대의 괴짜 철학자 디오게네스는 우연을 갖고 놀았다. “우연에는 용기를!” 독일의 철학자 니체는 ‘현존재의 거대한 주사위 놀이’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최근에는 프랑스의 철학자 들뢰즈가 다시 우연을 사고하기 시작했다. 현대 철학도 주사위 놀이를 하기 시작했다.

각종 놀이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 ‘코덱스 알폰소’에 실린 그림 중 체스와 주사위놀이 그리고 말판놀이에 대한 인도의 우화가 담긴 삽화(그림 위). 예수가 못 박힌 십자가 아래서 주사위놀이를 하고 있는 로마 병정을 그린 독일의 채색화.-사진제공 진중권

● 우연의 예술은 없다

성서에 따르면 신은 혼돈으로부터 조화를 창조했다. 이렇게 우주를 ‘조화’로 느꼈던 시대에 예술가들은 ‘또 다른 신’으로서 작품으로 코스모스를 창조하려 했다. 하지만 하이젠베르크 이후를 사는 우리에게 우주는 무엇보다도 우연이 지배하는 혼돈의 세계다. 이런 시대에는 예술도 카오스를 닮아 간다. 가령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자 잭슨 폴록(1912∼1956)의 작품을 생각해 보라.

폴록은 캔버스를 바닥에 눕혀 놓고 막대에 페인트를 묻혀, 캔버스 위에 흘리는 식으로 작업을 했다. 물감이 캔버스에 떨어져 어떤 형상을 만들어낼지는 철저히 우연에 맡겨진다. 그렇게 나온 작품은 당연히 혼돈의 상태를 보여 주게 된다. 하지만 완전히 우연적인 예술이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왜? 우연히 발생한 여러 경우 중에서 하나를 고르는 것은 어차피 예술가의 과제로 남기 때문이다

● 카오스모스

첫눈에 폴록의 작품은 철저하게 우연의 산물로 보인다. 하지만 그가 그저 물감을 뿌리기만 했을까? 그 역시 뿌려진 물감의 형상을 보고, 다음은 어디에 물감을 뿌릴지 계산을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카오스(혼돈)+코스모스(조화)=카오스모스(chaosmos)라 할 수 있다. 고대의 신화적 카오스에서 근대의 신학적 코스모스로, 거기서 현대의 예술적 카오스모스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세계다.

그림을 보라. 폴록의 것처럼 보이나, 실은 어느 러시아 화가의 작품이다. 약간 거리를 두고 바라보면, 저 혼돈 속에 한 인물의 얼굴이 떠오를 게다. 누굴까? 1980년대 한국 젊은이들을 들뜨게 했던 어느 혁명가다. 필연은 속박이고, 우연은 자유다. 그래서 한때 폴록의 추상표현주의는 공산세계에 맞서는 자유 진영의 상징으로 선전되기도 했었다. 자유의 주사위는 던져졌다. 필연의 철학자 레닌의 얼굴 위로. 기뻐해야 할까?

진중권 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진중권은 누구?

△1963년 서울 생

△1982∼92년 서울대 미학과, 동(同) 대학원 졸업

△1994∼98년 독일 베를린자유대 철학박사과정 수료

△2003년 중앙대 독어독문과 겸임교수

△저서 ‘미학오디세이’(전 3권), ‘춤추는 죽음’(전 2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