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개혁군주를 들라면 세종(世宗)과 정조(正祖)가 으뜸이다. 하지만 국사학자들이 세종보다 정조를 더 쳐주는 데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문약했던 세종이 화려한 문치(文治)를 펼 수 있었던 것은 왕자의 난에서 승리한 태종이 ‘피바람의 정치’로 정적을 모조리 제거한 덕분이었다. 반면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가둬 죽인 노론 세력에 둘러싸여 있었다. 개혁은 정조의 사활이 걸린 필생의 화두였다. 정조의 개혁정책이 결실을 맺었다면 한국의 19세기 역사가 그저 ‘어둠의 시대’이진 않았을 것이다. 서양과 일본의 19세기는 화려했다. 한국의 19세기는 소멸하는 등불처럼 사그라졌다. 그 쇠잔의 대가를 우리는 지난 200년 동안 치렀다. 개혁 실패가 짐 지운 국가적 고난이었다.
▼理念보다 實用중시한 인재등용▼
광복 이후 최대의 개혁 정권인 노무현 체제가 본격적으로 출범했다. 청와대와 국회의 권력지도를 바꾸고 시민단체로부터 막강한 지원을 받고 있기에 정조보다 훨씬 유리한 입지를 차지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인지 노 대통령은 종횡무진 자기사람 심기에 여념이 없다. 개혁세력을 구축한다는 명분이지만 정권 창출의 일등공신인 김혁규, 이해찬을 재상후보로 올리고, 청와대를 386참모들로 무장시키고, 배짱과 이념이 맞는 지식인들을 요직에 두루 앉혔다. 색깔과 과거 경력이 다른 사람들은 얼씬도 못할 정도로 요새화됐다.
정조는 노론 세력을 견제하려고 남인(南人)을 요직에 앉혔지만 재상 채제공은 화해의 달인이며, 대사성 이가환은 시대의 천재이고, 후대의 대학자 정약용은 실학을 집대성했다. 노론 주도의 관념론적 성리학에 빠진 조선을 실용주의로 구출하고 미래지향적 정치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노무현 사람들은 과거 행적으로 피아(彼我)를 구분하고, 국민을 두 개의 이념집단으로 나누고, ‘실용하자’는 현실주의를 이념적 정향으로 재단한다. 진보란 과거를 불문에 부치고 모두 함께 미래로 가자는 뜻이다. 과거 행적으로 인재를 밀어내고 너와 나를 구분하는 것은 진보가 아니다.
정조는 지식을 숭상했다. 서얼 출신이라도 탁월하다면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발탁해 미래 개척의 인재로 삼았다. 유득공 박제가 이덕무가 그들인데, 이들이 뿌린 씨앗은 19세기 중반 개혁가 박규수를 낳고, 후반에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유길준 등 어두운 시대를 고통스럽게 지키려 했던 역사의 파수꾼을 배출했다. 노무현 사람들은 겉으론 열린 정신을 외치지만 이미 닫힌 소수의 권력집단을 구성했고, 다른 목소리를 낸다고 유능한 인재들을 ‘구제불능의 보수’로 낙인찍는다. 지식국가로 발돋움하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최고 대학들을 엘리트집단, 학벌주의의 온상으로 매도하는 이유, ‘이념과 운동’을 ‘논리와 지성’보다 더 높게 치는 이유들은 진보정치의 본질을 훼손한다.
천도는 무엇인가? 노론이 들끓는 한양을 탈출하고 사도세자를 신원(伸寃)하려는 정조의 돌파구는 화성 천도였다. 그것이 옳은 선택이었는가는 국사학자들에게 맡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화성을 상업 중심으로 만들고 새로운 균역제도를 실시해 생산성을 높이려 했다는 사실이다. 상업이란 정치의 새로운 기반, 그것도 미래를 여는 개혁정치의 기반이었다.
▼수도이전 정치적도박 이라면…▼
노무현 정권은 새로운 권력기반이 필요해서 천도하려 하는가? 수도권에 포진한 기득권층과 재벌과 상공계층이 그렇게도 구제불능인가? 그렇다면 과밀해소, 균형발전이라는 슬로건은 미래를 확실히 담보해주는가, 아니면 정치적 도박인가? 천도에 소요되는 45조원, 자주 국방 200조원, 농촌지원 119조원 등으로 현대자동차, 삼성전자 같은 세계적 기업을 100여개, 괜찮은 일자리 100만개를 만들면 기업인과 임금노동자 모두가 진정한 지지자가 되지 않을까? 정조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노무현 정권은 이제라도 200년 전 정조의 통치술을 배워야 한다.
송호근 객원논설위원·서울대 교수·사회학hknsong@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