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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밑줄긋기]“고백하라! 그대의 마음을, 지금”

입력 | 2004-06-17 19:03:00


“아무런 희망이나 조건 없이 그냥 말할게요. 내게 당신은 완벽해요. 가슴이 아파도 당신을 사랑할 겁니다. 당신이 이렇게 될 때까지(미라 그림을 보여준다)”

-영화 ‘러브 액츄얼리’에서 마크가 친구의 아내인 줄리엣에게-

미련한 녀석 같으니. 뭘 어쩌겠다고…. 영국영화 ‘러브 액츄얼리’(DVD·유니버설)에서 친구의 아내에게 사랑 고백을 적은 도화지를 한 장씩 보여주던 마크가 못내 안쓰러웠다.

‘에라, 이 바보야’하고 마음속으로 그를 쥐어박았지만, 고개가 끄덕거려지는 면이 없는 건 아니다. 하긴,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저렇게 해야 할 때가 있는 거지. 어쨌든 줄리엣의 키스나마 얻었으니.

그러고 보니 ‘러브 액츄얼리’는 고백의 아름다움을 설파하는 영화 같다. 아빠는 같은 반 아이를 짝사랑하는 아들에게 가서 말하라고 부추기고, 소설가는 말이 통하지 않는 처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러 포르투갈까지 날아가며, 총리는 웨이트리스에게 마음을 전하려고 허름한 동네의 골목을 헤맨다. 남녀간의 사랑은 아니지만 늙은 가수는 뚱보 매니저에게 “네가 소중하다”는 말을 해주기 위해 젊은 여자들을 뿌리치고 달려온다.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다. 공항 검색대를 뛰어넘거나 성가대원을 빙자해 아슬아슬한 고백의 시간을 마련하고 낯선 외국인을 감시하러 동네 사람들이 줄줄이 따라붙는 상황, 합리적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위험을 기꺼이 감수한다. 친구의 아내, 출국하는 소녀, 의사소통이 안 되는 외국 처녀처럼 ‘함께’ 사랑을 이룰 가능성이 희박해 보이는 상대에게까지 기어이 고백을 하고야 말게 만드는, 이 희한한 마음의 정체는 뭘까.

뇌과학자인 김종성 교수(서울아산병원 신경과)에게 물어봤다. 그에 따르면 사랑은 유전자의 효과적 증식을 위해 진화된, 근본적으로는 이기적 행위다. 사랑하는 마음은 뇌에서 ‘보상 작용’과 관계있다고 간주되는 기저핵, 전두엽 등을 활성화시킨다. 이 부위는 마약을 하거나 돈을 건 게임을 할 때도 똑같이 활성화된다. 뇌의 입장에서 보면 사랑은 뭔가를 얻기 위해 애를 쓰는 행위인 것이다.

김 교수는 “사랑을 이룰 수 없는데도 고백을 하는 까닭은 고백을 함으로써 사랑을 어느 정도 이뤘다는 자기만족을 갖기 때문이 아닐까”하고 추측했다. “고백을 통해 스스로가 만족을 얻는다면 그때 뇌의 모습은 결국 ‘보상 작용’ 때와 비슷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러브 액츄얼리’에서 짝사랑하는 아이가 오늘 밤 미국으로 떠난다고 아들이 절망하자 아빠는 “더 잘됐네. 손해 볼 거 없잖아. 고백해”라고 독려한다. 고백은 자기만족적이다. 사랑하는 상대보다는 사랑에 빠진 자신의 감정에 충실하기 위한 수단이다. 내 고백으로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릴 상대에 대한 고려보다 끓어 넘치는 열정을 드러내려는 나의 욕망이 더 중요하다. 받아들여지고 아니고는 그 다음 문제다.

‘러브 액츄얼리’에서 마크보다 더 안쓰러운 사람은 끝내 고백을 하지 못한 여자 사라였다. 정신장애를 겪는 오빠 때문에 사랑도 할 수 없었던 사라는 만약 오빠가 없었더라면 덜 외롭고 더 행복했을 것이다.

그러나 DVD에 실린 ‘삭제장면 모음’에는 사라가 원하던 사랑을 얻지는 못했지만 오빠의 삶에 약간의 빛을 던져주는 장면이 나온다. 사라가 계속 눈에 밟혔던 나는 이 삭제장면을 보며 ‘그래, 이제 됐어’하는 안도감으로 마음이 편해졌다. 그제야 ‘사랑은 어디에나 있다’는 이 영화의 주제가에 동의할 수 있게 됐다.

김희경기자 susann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