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카미 하루키의 ‘위스키 성지 여행’은 사진작가인 부인과 함께 스코틀랜드 아일레이 섬의 양조장을 둘러보고 쓴 기행문이다. 이 책에는 싱글 몰트(맥아) 위스키 대신 블렌디드 위스키를 마시는 것을 두고 “천사가 내려와 아름다운 음악을 연주하려는 순간에 TV 재방송을 트는 것”에 비유하는 표현이 나온다.
위스키는 몰트를 원료로 만든다. 양조장 한 곳의 몰트 원액만으로 만드는 게 싱글 몰트 위스키이고 수십 종의 몰트와 옥수수나 밀이 원료인 그레인 위스키를 섞어 만드는 게 블렌디드 위스키다. 이름을 대면 누구나 아는 밸런타인, 조니워커, 로열 살루트, 커티 삭 같은 수입 위스키와 모든 국산 위스키는 블렌디드 위스키이다.
기자 역시 어쩔 수 없는 자리가 아니면 블렌디드 위스키를 마시지 않는데 그 이유를 물으면 “개성이 없다”는 것 외에 답변이 궁해지곤 했다.
얼마 전 국내 한 와인 수입업체 사장에게 “어떤 와인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더니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와인을 꼽았다.
그에 따르면 보르도 와인은 이를테면 화장을 잘한 미인이다. 태어나기도 예쁘게 태어났는데 여기에 메이크업까지 짙게 했다. 이에 비해 부르고뉴 지방의 와인은 화장을 하지 않은 자연 미인에 가깝다는 것이다.
이런 느낌의 차이는 포도의 품종이나 양조 방법에서 오는 것도 있지만 블렌딩 작업의 영향도 크다. 보르도에선 양조자가 카베르네 소비뇽이나 메를로 같은 품종에 카베르네 프랑이나 프티 베르도 같은 품종을 블렌딩해 전혀 새로운 향을 창조해낸다. 이에 비해 부르고뉴 지방에선 피노 누아라는 단일 품종을 쓰는데 밭의 특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어쭙잖은 싱글 몰트 위스키 마니아는 이 시점에서 생각이 복잡해진다. 싱글 몰트를 위한 설득력 있는 변명을 하나 더 얻게 된 건 좋지만 문제는 일관성이다. 보르도 와인이 더 입에 맞는 것이다.
진정한 음악 애호가라면 독주도, 4중주도, 오케스트라도 모두 좋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자연이 주는 아름다움도 좋지만 궁극적인 아름다움에 다다르기 위한 인간의 노력을 무시할 수 있는가. 지독한 편식의 시절을 이제 접어야 할지 모르겠다.
홍석민 기자 sm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