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카페 간판이 보이거나, 버스에 앉아 졸음이 올 때나, 바쁘게 일하고 커피 한 잔의 여유가 있을 때나, 갑자기 창 밖으로 소낙비가 쏟아질 때나, 잠들기 전 양의 숫자를 셀 때나, 언제나 사랑하는 이를 생각해 보세요. 많은 관심은 더 큰 사랑을 만듭니다.’
친한 후배의 싸이월드 미니 홈피에서 이 글을 ‘펐다’. 이처럼 예쁜 글은 전자 생쥐(마우스)보다는 동그란 티스푼으로 살짝 퍼 올렸으면 좋겠다. 얼마 전 불면증에 시달렸을 때, “양의 숫자를 세는 고전적 방법은 어떨까”라는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를 보내준 친구의 얼굴이 떠올랐다. 놀랍게도 양 13마리를 세다가 잠이 들었다.
사실 나는 후배의 미니 홈피에서 글보다 훨씬 많은 양의 사진을 얻는다. 대개 디지털 카메라 사진이다. 후배가 직접 찍은 사진도 있지만 후배의 후배, 또 그 후배의 후배가 찍은 사진도 있다. 디지털 사진은 무한 생식 능력을 지녔다. 나는 디지털 카메라가 창의적 사고를 위한 역동적 메타 미디어라는 굳건한 믿음을 갖게 됐다.
최초의 사진술 발명은 18세기말 소수 부유층이 이룩한 살롱 학문의 업적 중 하나이다. 사진 기술이 발달하면서 19세기 초에는 사진으로 만든 초상화가 인기였다. 시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21세기 인터넷 살롱에서 디지털 카메라는 중요한 감성 도구가, 사진을 찍는 행위는 만인의 퍼포먼스가 됐다.
휴대전화를 베고 낮잠을 자는 강아지 사진, 매연을 내뿜는 외국 버스 뒷면에 그려진 남자의 흡연 사진, 둥그런 접시 위에 남은 파전의 파를 사람 눈과 머리카락 모양으로 배치해 ‘고뇌하는 파전’이라고 이름 붙인 사진…. 인터넷 살롱의 공개 경연장에서 내 노트북 컴퓨터로 거처를 옮긴 사진들이다. 이들은 관람객이 사진 찍는 주체로 옮아왔다는 점에서, 유쾌한 농담을 걸어온다는 점에서 마르셀 뒤샹이나 요셉 보이스의 현대 미술과도 성격이 같다.
다시 양의 숫자를 세는 이야기로 돌아간다. 어차피 디지털 의식의 문화 생식 능력은 선형 구조에서 벗어나 있지 않은가. 당신은 어떤 생김새의 양을 연상하는가. 나의 양은 또 다른 친구의 싸이월드 미니홈피에서 봤던 사진 속 양의 모습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친구가 함께 남겼던 글은 기억나지 않는다. 적어도 내 경우에 있어서는 사진이 텍스트를 이겼다.
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