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을 가진 사람
배한봉
양파는
겨울 한파에 매운맛이 든다고 한다
고통의 위력은
쓸개 빠진 삶을 철들게 하고
세상 보는 눈을 뜨게 한다
훌쩍 봄을 건너뛴 소만 한나절
양파를 뽑는 그의 손길에
툭툭, 삶도 뽑혀 수북이 쌓인다
둥글고 붉은 빛깔의
매운 시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수확한 생각들이 둥글게, 둥글게 굴러가는
묵시록의 양파밭,
많이 헤맸던 일생을 심어도
이젠 시퍼렇게 잘 자라겠다
외로움도 매운맛이 박혀야 알뿌리가 생기고
삶도 그 외로움 품을 줄 안다
마침내 그는
그늘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 시집 ‘우포늪 왁새’(시와 시학사) 중에서
듣기로, 소리꾼의 소리가 아무리 맑아도 그늘이 없으면 소리로 치지 않는다 했다. 저 은유가 어찌 소리꾼에게만 국한되랴 싶었는데 오늘은 또 양파소리꾼을 만났다.
어쩌면 소리꾼이 소리를 얻는 과정과 양파가 매운맛을 얻어가는 과정이 저리도 똑같은가? 매운맛은 양파의 소리요, 피를 토하며 폭포의 굉음을 뚫는 소리꾼의 삶은 소리꾼의 겨울이다.
겨울을 춥게 건너지 못한 나무들은 여름이 와도 병에 약하다 한다. 맨몸으로 겨울을 나는 식물들은 제 몸의 피(樹液)를 고아서 부동액(不凍液)을 만들어 얼지 않는다 한다.
겨우내 물 한 모금, 흙 한 줌 없어도 붉은 그물망 속 시퍼렇게 눈뜨던 양파들 눈매 지금도 선연하다. 장하기도 하지, 저마다 득음(得音)하듯 매운맛 알뿌리 하나씩 둥글게 품으셨어!
그늘은 어둠이 아니라 깊이다. 뿌리 없이 많이 헤맸던 일생들아, 세상 춥거나 덥거나 매운맛 하나 오지게 품고, 염천의 여름 너머, 북풍의 겨울 너머, 거듭되는 삶의 냉온탕을 시퍼렇게 건너야겠다. 더러 바람 시원하고, 가슴 훈훈한 일도 있으리.
반칠환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