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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카페]71년 황금사자기 경북고 우승 주역 남우식씨

입력 | 2004-06-20 18:27:00

“그 때가 내 생애 최고의 날이었죠.” 71년 7경기를 혼자 완투하며 경북고를 황금사자기 정상으로 이끌어 고교야구사상 최초 5관왕달성의 주역이 됐던 무쇠팔 남우식씨. 사회생활에 전념해 온 그였지만 야구에 대한 애정만은 끊을 수 없었다. 회사 책상서랍속에 넣어두었던 야구공을 꺼내든 남씨. 권주훈기자


《1971년 10월6일 성동원두. 제25회 황금사자기 전국고교야구대회 경북고와 중앙고의 결승전. 입추의 여지없이 동대문구장을 가득 메운 관중들은 모두 숨을 죽였다. 경북고는 그 해에만 이미 4관왕에 오른 최강. 반면 중앙고는 처음 결승전에 올랐다. 중앙고가 4회전에서 경북고를 2-1로 누른바 있어 기대는 더욱 컸다.

하지만 결과는 패자부활전을 거쳐 어렵사리 올라온 경북고의 6-0 완승. 그러자 중앙고 응원단이 많았던 관중석에서 의외의 반응이 나왔다. 모두가 기립해 뜨거운 박수를 보낸 것.

경북고가 고교야구 사상 최초로 5관왕을 이룬 데 대한 찬사만은 아니었다. 박수는 마운드로 쏠렸다. 1회전부터 결승전까지 경북고가 치른 7경기에서 꿋꿋하게 완투를 한 경북고 3년생 투수 남우식에 대한 격려였다.》

그로부터 33년이 지난 올 6월. 까까머리 고교생에서 이젠 50대 중년신사가 된 남우식씨(52)를 만났다.

“그 때가 생애 최고의 날이었죠. 이전에 4개 대회를 모두 휩쓸었어도 최고 권위의 황금사자기를 놓치면 말짱 도루묵이었으니까요. 정말 최선을 다해 던졌지요.”

당시 스피드건이 있었다면 시속 150km는 나왔을 것이라는 남씨는 지금은 ㈜롯데햄우유의 어엿한 임원. 지난달 이사로 진급해 야구선수 출신 대기업 이사 1호를 기록했다.

경북중 1학년 때부터 야구를 시작한 남씨는 고교에 진학해서도 1학년 때부터 줄곧 주전투수로 거의 모든 대회에서 완투를 했다.

“요즘은 선수보호 차원에서 봐도 말이 안 되는 얘기지요. 하지만 당시에는 당연한 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남씨와 황금사자의 인연은 1학년 때인 69년 23회 대회부터 시작됐다. 주전투수로 6경기를 완투한 그는 결승전에서 선린상고에 난타당해 5-12로 무릎을 꿇었다. 감투상을 받은 게 첫 훈장.

이듬해 24회 대회에서 경북고는 치욕을 당했다. 2회전에서 성남고의 변화구 달인 노길상에게 황금사자기대회 사상 첫 무안타 무4사구의 노히트노런을 당한 것. 스코어는 0-1.

“오기가 생겼지요. 졸업 전에 반드시 황금사자기와 순은제 우승컵을 안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와신상담. 결국 남씨는 71년 대회에서 우승의 꿈을 이뤘고 평생 잊지 못할 추억과 자긍심까지 덤으로 얻었다.

그 해 최초로 일본과의 고교 교환경기가 열렸다. 한국 대표팀은 황금사자기 우승팀인 경북고가 주축. 여기서 남우식이 맹활약한 한국 선발팀은 콧대 높던 일본팀에 6전 전승을 거두는 쾌거를 이뤘다. 깜짝 놀란 일본야구협회장이 직접 찾아와 매년 정기전을 치르자고 사정했을 정도.

이처럼 대단했던 그에게도 당시 라이벌이 있었을까?

“71년 대회 결승에서 맞붙었던 1년 후배인 중앙고 윤몽룡이 투타에서 뛰어났죠. 투수로 나서면서도 홈런상을 받았으니까요. 청룡기 결승에서 맞붙었던 동기생인 경남고 김성관도 대단했습니다.”

남씨는 졸업 후 한양대로 진학했고 대학 4학년이던 75년 7월 창단된 실업 롯데 자이언츠의 원년 멤버로 성인무대에 섰다. 하지만 그는 상무에서 3년 복무한 뒤 79년 친정 롯데에 복귀한 이듬해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당시 야구인들은 “너무 잘 던져 탈이었다. 이틀이 멀다하고 완투하는 바람에 어깨가 망가졌다”고 안타까워했다.

이에 대한 남씨의 말은 다르다. “부상이야 치료하면 되지만 다른 이유가 있었죠. 당시엔 프로가 없었잖아요. 하루라도 빨리 다른 길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가 야구를 그만두고 둥지를 튼 곳이 롯데햄우유. 올해로 한 회사에서만 24년째 근무한 그는 마침내 직장인의 별이라는 이사에 올랐다. 체육학과 출신으로서 어려움은 없었을까?

남씨는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습니다”라고만 간단하게 답했다. 처음에 영업파트에 들어가 지점장에 오를 때까지 16년간 한 우물을 팠다. 96년 관리부서로 자리를 옮겨 2001년 이사보에 오른 뒤 올해 이사로 승진.

야구에 대한 미련은 없었을까?

“프로야구가 생겼을 때 연고팀 삼성에서 현역복귀 제의가 왔지만 거절했어요. 이후 여러 팀에서 연락도 있었지만 이 길이 내 길이라는 생각에 마음을 바꾸지 않았죠.”

그렇다고 그가 야구를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다. 90년 회사 안에 직장인 야구팀을 창설했고 총감독을 맡아 사회인 야구계의 알아주는 강팀으로 성장시켰다.

그는 책상 속에 넣어두었던 야구공을 꺼내 만지작거리며 “직장일이 바빠 짬이 날지 모르겠지만 올해 황금사자기대회 때는 오랜만에 성동원두를 찾아봐야겠다”고 말했다.

전 창기자 jeon@donga.com

▼남우식씨는…▼

생년월일 1952년 2월 23일(만 52세)

신체조건 신장 1m76, 74kg(현재 79kg)

출신교 경북중-경북고-한양대-한양대 대학원

야구시작 경북중 1년 때(체격 조건이 좋다

고 선발됨)

소속팀 실업 롯데(75∼76년·창단 멤버) 상

무(77∼79년) 실업 롯데(79∼80년)

현직 ㈜롯데햄우유 이사

취미 등산, 헬스, 조깅

가족관계 부인 문미영씨(49) 아들 경민(23)

재민(21)

주요경력 △70년 제4회 대통령배대회 우승 주역 △71년 제25회 황금사자기대회 등 사상 최초 전국고교대회 5관왕 주역(완투) △71년 한일고교교환경기 선발투수로 출전 6전 전승 △75년 제9회 대통령기전국대학대회 결승전 승리투수

수상내역 △69년 제23회 황금사자기대회 감투상 △70년 대통령배대회 우수투수상, 타격상(타율 0.462) △71년 황금사자기대회 우수선수상, 봉황기대회 최우수선수상, 대통령배대회 우수선수상, 청룡기대회 우수선수상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