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악마’를 모티브로 입시경쟁과 군대, 직장생활 등 한국인이 공감하는 정서를 퍼포먼스로 표현한 ‘천적지악마’. 사진제공 아트컴퍼니 포아
《2002년 6월 한일월드컵, 우리 사회는 거리 응원을 보며 ‘월드컵(W) 세대’가 탄생했다고 떠들썩했다. 자기 비하에 젖은 기성세대와 달리 W세대는 ‘꿈은 이루어진다’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말했고, 현재를 당당하게 즐길 줄 알았다. 열정적 응원 속에서 보여준 그들의 자제력과 질서의식은 세계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
그러나 불과 2년이 지난 후, “한국인이란 사실이 이토록 자랑스러운 적은 없었다”고 말하던 기억은 빠르게 잊혀지고 사람들의 어깨는 다시 움츠러들고 있다. 경기침체로 어려운 요즘, ‘붉은악마’의 열정과 희망을 되살리는 이색 공연이 펼쳐지고 있다. 9월 12일까지 계속되는 비주얼퍼포먼스 ‘천적지악마(天赤地樂魔)’.
19일 밤 11시 서울 강남구 청담동 우림청담시어터. 토요일 밤 객석을 가득 메운 젊은이들은 “가슴을 활짝 펴고 천적지앙마, 희망을 모두 모아 천적지앙∼마”라는 주제가에 맞춰 손뼉을 치며 몸을 흔들어댔다. 공연이 끝난 후 출연진은 객석으로 뛰어 들어가 관객들과 어울려 ‘아리랑’ 응원가를 부르는 등 마치 스탠딩 콘서트를 방불케 했다.
“‘붉은악마’는 쿨하고, 당당하고, 함께 즐길 줄 아는 21세기 한국의 젊은이들을 상징합니다.” (프로듀서 이준한)
‘천적지악마’는 “하늘아래 땅위에 붉은 악마(한국인)가 가득하다”는 뜻. 한 사람이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학교를 다니고, 군대를 가고, 직장생활을 하고, 사랑하고 결혼하는 과정을 영상, 무용, 비트, 전통놀이 등을 이용한 다양한 퍼포먼스로 보여준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공연인 만큼 젊은층이 선호하는 유행코드가 곳곳에 담겨 있다. 또 입시와 군대, 직장생활 등 어렵고 힘든 삶의 고비도 놀이를 통해 즐기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고교 시절 숙제장 뺏기 놀이와 DDR위에서 추는 탭댄스가 이어지고, 대학교 도서관에서는 컴퓨터 자판 두들기는 소리와 하품소리, 책을 여닫는 소리, 물통, 휴지통 두들기는 소리가 하나의 흥겨운 타악리듬으로 변한다. 군 입대 후에는 ‘무적의 태권V’ 노래에 맞춰 랩송과 파워 넘치는 춤이 등장한다. 가장 큰 박수가 터져 나오는 장면은 두 출연자가 컴퓨터 게임 ‘스트리트 파이터’처럼 장풍에 맞아 날아가고, 온몸이 빙그르르 돌면서 격투기를 재현하는 대목.
치우천왕과 광개토대왕을 숭상하고, 패션 소품처럼 친근하게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록 음악으로 편곡된 아리랑과 ‘로봇태권V’를 부르는 젊은이들에겐 자발적으로 뿜어져 나오는 ‘신세대 애국주의’도 엿보인다. ‘천적지악마’의 프로젝트 매니저 오세정씨는 “월드컵 거리응원은 단순한 축구응원이 아니었고, 내 나라 내 민족의 성공과 번영을 기원하는 축제였다”며 “요즘 지쳐있는 사람들이 공연장을 찾아 힘을 얻을 수 있도록 응원해주자는 것이 이 퍼포먼스의 취지”라고 설명했다.
화∼목 오후 8시, 금토 오후 8시 11시(심야), 일 오후 4시. 02-501-3599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