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치판은 정권이 벌이고, 국민은 언제까지 설거지를 해야 하나.
김영삼 정권은 임기 중에 ‘선진국 진입 잔치’를 하려고 환율정책 등에 무리를 했다. 선진국 환상은 과소비를 부추겼다. 돌아온 건 외환위기였다. 그 설거지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김대중 정권은 ‘환란 극복 잔치’를 너무 서둘렀다. 충동구매와 투기를 부채질한 카드정책과 부동산정책도 그 파티의 메뉴였다. 신용불량자 양산과 빈부격차 확대의 설거지가 힘겹다.
노무현 정권은 어떤가. 카드를 몇 개씩 만들어 그어대다가 신용불량이 된 사람들처럼, 국민이 잠시 맡긴 카드를 너무 통 크게 긋고 있는 건 아닌가.
▼국민의 뒷감당 너무 힘겹다▼
노 대통령은 “반미면 어떠냐”고 했다. “자주국가의 체면 살리는 일은 내게 맡기라”고도 했다. 자존심도 공짜로는 못 지킨다. 주한미군 감축과 맞물린 국방비 증액은 당장 내년부터 국민 주머니를 더 압박하게 생겼다. 여권 일부와 사회 곳곳에서 ‘미국 때리기 잔치’가 한창이다. 그 경제적 설거지 비용이 얼마나 더 늘어날지 안개 속이다.
대통령이 “재미 좀 봤다”는 행정수도 이전 공약은 천도(遷都)의 단계로 들어섰다. 비용이 45조원이네 120조원이네 주먹구구 싸움이 한창이지만, 행정 사법 입법부가 사라진 ‘수도 아닌 서울’의 국제적 브랜드 값은 어떻게 될지도 따져야 한다. 3년8개월 남은 정권의 명운보다 중요한 건 나라의 운명이고 국민의 뒷감당이다.
5년간 115조원이 들어간다는 ‘국가균형발전계획’도 막을 올렸다. 실리콘밸리와 맞먹는 산업단지를 2∼3개 만들고, 곳곳에 ‘혁신 미래도시’도 세운다고 한다. 국가기관의 대규모 지방이전도 추진 중이다. 가히 국토개조, 국가개조다.
알토란 같은 기업들이 무수히 떠난 뒤에 누가 ‘한국의 실리콘밸리’와 미래도시를 채워줄지…. 규제 간섭과 노사갈등과 고임금과 반(反)기업정서에서 탈출하려고 썰물처럼 해외로 빠지는 기업들을 당장 붙잡아 둘 수 있는 대책이 더 급할 텐데 싶다.
정부가 큰 그림만 그리면 기업도 국민도 한 몸처럼 따라주고, 어떤 부담도 마다하지 않을까. 청와대가 경제의 큰 틀을 설계해서 진두지휘하면 산업과 기업이 그 틀 속에 차곡차곡 들어가 잘 자라줄까.
그런 몇 장의 설계도에 만인의 이익과 욕구를 담아내겠다고 꿈꾼다면 참으로 순진하다. 민간에 맡기면 더 생산적일 돈을 국가가 끌어들여 국부의 창출효과를 떨어뜨리기 십상이다.
지난해 정부는 10년 뒤 먹고 살 것을 걱정해 10대 신성장 산업을 지정하고 연간 4000억원씩 투자하는 계획을 내놨지만, 삼성전자 하나의 1년 기술개발예산이 4조원인 세상이다. “한국 정부는 시장보다 자신들이 더 똑똑한 줄 알지만, 결코 시장을 따라가지 못한다.”(외국계 투자회사 임원)
국책사업에 드는 돈은 세금 증액, 민자 유치, 국유재산 매각, 국채 발행 등으로 마련해야 할 터이다. 그러나 만만한 게 없다. 증세(增稅)는 지금 같은 민생고, 투자와 고용 부진, 내수 침체, 중소기업 위기, 성장잠재력 저하 상황이라면 저항을 피하기 어렵다. 민자는 잇속이 맞아야 움직일 것이고, 국유재산 매각은 국고를 축내는 일이며, 국채는 곧 국민 빚이다. 국가부채는 우리 경제의 대외의존도와 고령화 속도를 감안할 때 이미 과도한 수준이다.
▼국가改造과욕, 재앙 안돼야▼
정부가 그랜드디자인을 만들어 국민과 기업을 동원하겠다는 생각을 바꿔야 한다. 기업을 조련(調練)과 지도(指導)의 대상으로 틀어쥐려는 권력욕망을 버려야 한다. 정부보다 이해타산이 빠르고 국제감각과 세계화전략도 앞서는 기업들이 더 신나게 돈 벌도록 기꺼이 조역(助役)으로 물러서는 게 국익에 봉사하는 길이다.
시장원칙을 지켜 주고, 규제의 족쇄를 풀고, 외국으로 튀기보다 국내에 남는 게 훨씬 이익이라고 판단할 만큼 인센티브를 만드는 역할이 정부의 몫이다. 이런 일에 충실한 것이 국가개조 과욕에 사로잡혀 ‘국책사업 잔치판’의 설거지를 국민에게 떠넘기는 것보다 현명한 선택이다. 민생을 위해서도, 정권의 명운을 위해서도.
배인준 수석논설위원 inj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