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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에세이]장원재/위기를 인정하자 길이 보였다

입력 | 2004-06-21 18:48:00


한국 3, 북한 0. 종료 휘슬이 울렸다. 아무도 승리의 환호성을 터뜨리지 않았다. 이겼으되 이긴 게 아닌 경기였다. 최종 성적 2승2무1패. 어깨를 늘어뜨린 채 선수들은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그때였다. 관중석에서 함성이 터져 나왔다. 한국 벤치는 열광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었다. 대(對)일본전, 종료 10초 전에 터진 이라크의 동점골. 그 덕분에 한국은 극적으로 기사회생해 1986년 이후 3연속 월드컵 진출에 성공했다. 사상 최초의 본선 진출을 꿈꾸던 일본의 눈물을 뒤에 남겨둔 채. 이것이 한국 축구사에 길이 새겨진 93년 ‘카타르 도하의 기적’이다.

지금 시중에는 한국 경제의 앞날을 두고 여러 얘기가 나온다. 위기라는 진단도 있고, 위기를 조장하는 언론이 문제일 뿐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반론도 있다. 물론 한국 경제가 위기가 아니길 바라지만 제반환경과 주변여건이 좋지 않다면? 때로는 위기를 위기라고 말하는 것이 문제해결에 더 도움이 된다. 사회 구성원 전체가 위기의식을 공유하는 게 필요하다는 말이다.

지금도 올드 팬들의 기억에 생생한 83년 세계청소년축구 4강 신화. 사실 우리는 참가자격이 없었다. 아시아청소년축구 동부지역 예선 첫 경기에서 중국에 0 대 2로 진 데 이어 북한과 처절한 공방전 끝에 3 대 5로 패해 동부지역 예선 3위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러나 82년 11월 방콕 아시아경기에서 북한대표팀이 주심을 집단폭행해 국제경기 2년간 출전금지라는 중징계를 받은 덕에 우리는 북한팀의 대타로 최종예선에 진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시아대회 우승을 차지하고 세계대회 본선에 나가 멕시코 호주 우루과이를 연파하며 4강까지 내달렸다. 한국의 ‘절대열세’를 예언한 세계 축구기자들의 예상을 번번이 뒤집으며.

83년 11월 일본 하코다테에서 열린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핸드볼 지역예선. 한국 여자팀은 중국에 22 대 25로 패해 탈락한다. 그러나 대회 개막 두 달 전, 동유럽 국가의 올림픽 보이콧으로 기적처럼 찾아온 대타 출전의 기회. 한국 여자핸드볼팀이 올림픽 본선에서 3승1무1패의 성적을 거두며 구기사상 최초로 은메달을 획득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리라.

만약 본선에서 실패했다면 우리는 새치기 기회나 엿보는 염치없는 인간이라는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개인과 팀과 나라의 명예를 더럽힐 수는 없지 않는가. 혹시 그 같은 처절한 위기의식이 놀라운 성취와 성공의 원동력이었던 것은 아닐는지.

94년 월드컵 본선. 한국은 스페인, 볼리비아와 비기고 독일에 2 대 3으로 분패하며 16강 진출의 꿈을 접었다. 그러나 외국 언론은 한국이 가장 아깝게 16강에서 탈락한 팀이라고 칭찬했다. 일본과 치른 예선전에서 90분 내내 유효 슈팅 하나 날리지 못하고 패배했던 한국팀이 본선에서는 세계 최강 독일을 쩔쩔매게 할 정도로 분투했기 때문. 당시 대표팀을 이끌었던 김호 감독은 그때 이렇게 말했다. “지금 한국 축구는 총체적 위기에 빠져 있다. 그러나 우리는 국민과 더불어 어려움을 헤쳐 나갈 각오와 의지를 가지고 있다.”

경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위기의 징후가 보인다면 사실을 사실대로 인정하고 알려주기 바란다. 김 감독이 그랬던 것처럼. 그것이 난국을 돌파할 수 있는 가장 빠르고 확실하며 효율적인 길이다.

장원재 숭실대 교수·대한축구협회 기술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