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는 여자’는 기존 로맨틱 코미디의 익숙한 문법을 훌쩍 뛰어넘어 색다른 재미와 감동을 전해준다. 사진제공 젊은기획
25일 개봉하는 장진 감독의 네 번째 영화 ‘아는 여자’는 장 감독만이 붙일 수 있는 제목이긴 하지만, 그간 그의 영화들(‘기막힌 사내들’ ‘간첩 리철진’ ‘킬러들의 수다’) 중 가장 무료한 제목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는 장 감독의 변화 조짐을 상징하는 중요한 변곡점이기도 하다.
장 감독이 변했다. 재주를 스스로 주체하지 못해 이리저리 엇나갔던 그의 영화는 이제 (그가 좋아하는 야구 용어로 말하자면) 홈런을 노리기보다는 방망이를 짧게 잡고 안타를 정교하게 쳐내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잘 나가던 투수 동치성(정재영)은 지금은 별 볼일 없는 프로야구 외야수다. 그는 애인에게 갑작스레 차이고 3개월 시한부 목숨이란 판정까지 받는다. 괴로워하던 그에게 늘 보던 바텐더 한이연(이나영)이 다가온다. 그냥 ‘아는 여자’였던 이연은 알고 보니 자기 집에서 서른아홉 발자국 떨어진 이웃집에서 함께 성장해 온 ‘오래된 여자’였던 것이다.
‘아는 여자’란 제목에서 간파할 수 있듯, 이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에서 숫하게 발견되는 익숙하고 상투적인 문법들을 하나하나 끌어온 뒤 그 한계를 훌쩍 뛰어넘어 버린다. 이 영화가 아름답고 웃기면서도 일정한 무게감을 갖는 이유는 찡한 감동과 기발한 웃음을 징검다리처럼 배열하는 장 감독의 동물적 박자 감각 때문이다. 장 감독은 웃음과 감동을 동시에 뽑아내는 로맨틱 코미디의 작법을 벗어나, 일단 코끝을 찡하게 한 후 “아니, 그게 아니고요”식의 생뚱맞은 대사와 상황을 불쑥 돌출시켜 후폭풍을 만든다.
치성을 ‘봉투에 쏙 넣어 들고 가는’ 이연의 모습을 담은 영화 속의 장면에서 보듯, 상상의 세계는 ‘자, 이제부터입니다’하고 예의바르게 들어오는 대신, 난데없이 이야기를 찢고 들어왔다가 천연덕스럽게 사라진다. 장 감독은 동화적인 낭만과 실험적인 상상력 사이에서 지능적으로 줄타기하면서 대사나 화면에 탄력 있는 여백을 남기는 허허실실 연출법을 보여준다. “나 처음인 게 많아요. 그래서 잘 모르는 게 많아요”라며 치성에게 입술을 죽 내미는 이연의 모습에서처럼 대사는 시적(詩的)이고 현실적인 동시에 뜬금없다.
이나영은 이제 ‘별 볼 일 없는 남자를 사랑하는 예쁜 여자’를 그려내는 데는 카메론 디아즈를 능가하는 수준이다. 또 정재영은 욕구불만에 가위눌린 소시민적 얼굴을 연극적 과장 없이 담아냈다. 치성이 평소 ‘아는 여자’인 이연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발견한 것처럼, 관객들도 알고 보니 ‘아는 남자’였던 정재영에게서 (당황스럽긴 하지만) 로맨틱한 요소를 발견하게 될 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면 그에게도 느끼한 쌍꺼풀이 있었다는 사실 같은…. 15세 이상 관람 가.
이승재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