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다. 두 차례 공청회로 모양 갖추기를 끝내고 이제 일사천리로 천도사업을 진행할 모양이다.
45조원을 들여 인구 2%를 수도권 언저리로 옮긴다고 어떻게 300만 인구일 때부터 만원이던 서울과 수도권의 과밀 현상이 해소되며 나머지 지역들의 균형 발전이 된다는 것인지, 전국이 하루생활권에 접어든 지금, 과거처럼 무소불위의 존재도 아닌 중앙정부가 청사를 옮긴다고 기업과 공장과 학교와 외국인투자도 뒤따라 이전할 것이라는 말인지, 엄청난 개발붐에 정부청사 매각까지 겹쳐 부동산은 과잉 공급되고 자본은 잠겨 경제위기가 걱정되는데 무슨 대비책이 있는지…. 숱한 질문에 납득이 가는 설명은 없는 채 말이다.
▼수도옮겨 지역발전은 시대착오▼
이렇게 밀어붙이는 것을 보면 균형 발전이 목적이 아니라 천도 자체가 이 정부의 목적임이 분명해진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한편으로는 수도권의 과밀 완화를 논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천도와 수도권 규제 완화를 맞바꾸는 ‘빅딜’ 구상이 나올 수 있겠는가. 그러니 ‘정권의 명운’을 걸고 ‘수구세력의 발목잡기’와 ‘수도권의 지역이기주의’를 넘겠다고 사뭇 비장한 자세까지 보이는 것이다.
사람이 아파도 큰 수술을 하려면 진단과 처방이 옳은지, 대안은 없는지 다른 의사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결정하는 법이다. 결정도 의사가 아니라 본인과 가족이 내린다. 의사가 서툴러 보이면 의사도 바꾼다. 그러나 천도의 경우,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는 길이 없다. 천문학적 치료비가 드는 데다 수술로 병이 낫는다는 보장도, 후유증으로 더 나빠지지 않는다는 확신도 없는 마당에 다른 의사들은 모두 속이 검으니 주치의 말만 믿으라고 한다. 답답한 일이다.
천도론의 진단과 처방은 옳지 않다. 불균형 성장전략의 유산을 불균형 성장의 방법으로 치유한다는 발상법 자체가 자가당착이다. 게다가 지금은 공간 거리가 아니라 거래의 연줄망이 지배하는 ‘네트워크 경제시대’다. 수도를 옮겨 경제 공간을 재편하겠다는 해법은 시대착오적이다. 정부가 이사할 것이 아니라 권한과 재정을 지방과 나누면 된다. 한곳에 물리적 개발을 집중할 것이 아니라 지방도시와 농촌의 사회문화적 자산을 키워 내부적 혁신 역량을 기르도록 도울 일이다. 아울러 청사진과 돈만 있으면 도시를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오만함도 버려야 한다. 도시는 사람들의 다양한 꿈과 땀과 기억이 시간과 함께 얽혀 자라는 생명체다. 정부가 단기간에 뚝딱 만들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된다.
천도론은 이제 하나의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린 것 같다. 그래서 실사구시의 눈으로 현실을 차분하게 풀어나가는 데에 필수적인 정신적 여유와 시간과 돈을 모두 독점해 버린다. 우리 사회에는 치유되어야 할 여러 불균형이 있다. 천도한다고 해서 도농, 노사, 남녀, 계층, 세대 사이의 불균형이 해소될 것인가. 과연 공간 불균형 해소가 최우선 과제인가. 사람이든 정부든 주어진 시간에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다. 차분히 우선순위를 분별하는 것은 미덕이 아니라 피할 수 없는 조건이다. 천도론은 정작 해야 할 일들로부터 시선을 돌리게 하는 대신 일이 잘 안 풀릴 때 내세우기 편리한 변명거리를 제공한다.
▼지나친 집착은 불행 부를 뿐▼
우리는 지금 다양한 가치가 공존하는 ‘해체의 시대’에 살고 있다. 게다가 우리는 좌와 우의 개혁을 동시에 추진해야 할 분열증적 시대과제를 역사로부터 물려받았다. 서로 다르게 살면서도 공유의 영역을 넓혀 가는 것이 우리 시대의 당면 과제다. 천도론은 자신의 신념을 일방적으로 강요해 이성마저 독점하려 한다. 특정 신념에 대한 편향된 집착이 가져오는 갈등과 불행을 오늘날 우리는 중동에서 똑똑히 보고 있다. 왜 균형 발전이라는 훌륭한 목적을 놓고 이와 배치되는 억압적 해법에 그토록 집착하는가.
강홍빈 서울시립대 교수·도시계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