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로지 비단옷 한 벌 걸쳐 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도쿠가와 시대의 에도 여인들. 그 욕망이 해삼을 세계적인 교역물품으로 만드는 줄은 알지 못했을 터입니다. ‘해삼의 눈’(B1)은 해삼이 전파된 길을 따라 태평양을 훑으며 세계 체제가 오로지 서구 중심으로 형성돼 왔다는 정설에 대해서도 도전장을 내밉니다. 7∼10세기 당나라의 수도로 융성했던 장안의 풍경을 그린 ‘장안의 봄’(B5)도 이(異) 문화들이 서로 만나는 장면을 흥미진진하게 그립니다. 콧날 오뚝한 페르시아나 인도 미녀들의 춤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는 당나라 사람들. 호기심은 다른 문화와 만나는 첫 걸음입니다.
21세기 지구인들은 서로 다른 문화가 가장 격렬하게 만나는 방식인 전쟁을 치러내고 있습니다. 총칼 앞에서 타자에 대한 소박한 호기심은 부정되고 ‘나와 다른 것’은 짓밟고 굴복시켜야 할 대상이 될 뿐입니다. 현대물리학은 베이징의 나비가 날갯짓 한 번 한 것이 뉴욕에서 태풍을 몰고 올 수도 있다는 나비효과 이론을 밝혀 냈지만 이 긴밀한 네트워크 시대에도 공생(共生)은 인류에게 요원한 과제입니다.
한 한국인 청년이 이라크 땅에서 죽어갔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이민족에게 모국어도 아닌 이국어로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애썼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조종(弔鐘)은 울립니까. 종은 바로 우리 자신, 이 야만의 시대를 호곡하며 울립니다.
책의 향기 팀 boo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