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영어만 잘하면 저 사람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을 텐데….”
한국에서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이런 불만을 자주 듣게 된다. 한국에서 영어는 경쟁력의 중요한 척도다. 엄청난 비용을 들여 자녀에게 영어 과외를 시키는가 하면 자녀의 영어 조기유학을 위해 기러기 부부 생활도 마다하지 않는다. 영어가 취업의 필수조건이 된 것은 벌써 오래 전의 일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싱가포르는 확실히 복 받은 나라다. 영어가 공용어인 이 나라에서 모든 사람들은 유창하게 영어를 구사한다. 당연히 영어 사교육에 돈을 쏟아 부을 필요가 없다. 여기에 70% 이상의 국민이 모국어로 중국어를 사용하며, 광둥(廣東)어, 인도어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의 사람이 다국어를 구사한다.
싱가포르는 이런 언어적 이점을 기반으로 아시아의 경제 ‘허브(Hub)’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허브’ 경쟁이 100m 달리기 경주라면 싱가포르는 주변국들보다 30m 정도 앞서서 출발한 것과 마찬가지라고나 할까.
그러나 제아무리 다른 나라 말을 유창하게 구사한다고 하더라도 그 나라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면 진정으로 상대방을 설득시켜 나의 편으로 만들 수 없다. 3년째 싱가포르에 살면서 느낀 점은 이 나라의 경쟁력이 단순히 언어 구사력이 뛰어나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언어능력의 저변에 타문화를 적극 수용하는 개방의식이 흐르고 있다는 점에 있다는 것이다. 문화적 상생 의식이 아시아의 소국인 싱가포르를 부국으로 거듭나게 한 중요한 원동력인 것이다.
싱가포르에서는 법정공휴일이 연간 10개다. 그중 6개가 종교와 관련된 공휴일이다. 종교 관련 공휴일이 많은 것은 이 나라가 다민족 국가이기 때문이다. 싱가포르의 인구는 중국계(76%) 말레이계(15%) 인도계(7%) 등으로 구성돼 있으며 유럽인이나 미국인도 많이 거주하고 있다. 싱가포르 달력을 들춰보면 이슬람 성지순례일, 기독교 성금요일, 석가탄신일, 힌두교 설날, 이슬람 금식 종료일, 성탄절 등 다민족을 골고루 배려하는 공휴일이 있다. 종교적 민족적 차별 없이 서로 다른 문화를 인정하며 살아가는 싱가포르인들의 사고방식이 공휴일 문화 속에도 고스란히 녹아 있는 것이다.
싱가포르가 여러 민족이 모여서 만들어졌고 많은 언어들이 사용되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구상에는 다민족 다언어 문화를 장점으로 승화하지 못하고 분쟁을 되풀이하고 있는 나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민족주체 의식이 강한 한국인들에게 싱가포르의 유연하고 개방적인 문화는 어쩌면 주관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또 가진 것이 전혀 없는 나라이니 남의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남의 것을 인정하고, 그것이 좋으면 내 것으로 수용, 발전시키는 것이 요즘과 같은 글로벌경제 시대에 중요한 덕목이 아닐까. 자신의 것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오히려 건전한 발전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박춘식 오라클 아시아·태평양 지역본부 마케팅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