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월요포럼]정갑영/이 땅을 떠나는 이유

입력 | 2004-06-27 18:54:00


얼마 전 미국에서 돌아온 동료가 전한 체험담이다. 몇 년간 그곳에서 생활한 터라 아이를 현지 고등학교에 보내려는데, 입학허가가 잘 나오지 않아 노심초사했다는 것이다. 미국 고등학교가 언제부터 그렇게 입학이 어려워졌을까. 결국은 교장을 만나 하소연했다. 그런데 고민을 털어놓는 것은 오히려 학교측이었다. “한국계 학생은 3명 정도 받을 수 있겠는데, 이번 학기에 무려 1000여명이 지원했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설명이었다.

▼美학교에 한국인 지원자 북적▼

뉴저지주에 있는 L고등학교의 얘기다. 문제는 그 학교만 그런 게 아니란 점이다. 기숙사 시설이 있는 어지간한 사립 고등학교들은 한국에서 몰려오는 조기유학생들로 행복한 고민에 빠져 있다. 1000명이 몰렸다면 입학지원서 수입만도 10만달러가 넘는데, 이런 학교가 한두 군데가 아니라고 한다. 정작 한국의 학교들은 재정난으로 허덕이는데, 외국 학교들은 한국 학생으로 호황을 누리고 있는 셈이다.

한국을 떠나는 흐름은 여기에만 그치지 않는다. 한 민간연구소의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 6000여명 중 74%가 ‘이민 준비 중’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니 홈쇼핑에서 캐나다 이민상품이 대박을 터뜨리는 것은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중소기업에 대한 여론조사에서는 390여개 기업 중 80%가 2년 또는 5년 이내에 해외로 진출할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실제로 국내의 설비투자보다 해외투자가 더 크게 증가하는 현상도 수년째 지속되고 있다. 올해 1·4분기(1∼3월)에 우리 기업이 중국에 투자한 규모만 해도 14억달러를 넘었다.

사람과 기업만 한국을 떠나는 게 아니다. 해외 이주비와 재산반출, 증여성 송금 등 자본의 해외 유출을 보면 올 초 넉 달 동안 45억달러가 나갔고, 유학과 연수비용은 작년 한 해에만 18억달러에 이르렀다. 모두 전년 대비 20% 이상의 급속한 증가율을 나타내고 있다. 최근 미 로스앤젤레스는 한국인들의 수요로 부동산 값이 급등했다지 않는가. 국내 증시에 투자한 외국자본마저 최근에는 이 땅을 빠져나가는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한국을 떠나려는 현상이 갈수록 심화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표면적인 이유는 대부분 자녀 교육과 실업, 불안한 사회와 노후대책의 마련 등이다. 기업은 높은 임금과 노사불안, 규제 등으로 더 이상 국내에서 경쟁력을 확보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나 탈(脫)코리아의 궁극적인 원인은 미래에 대한 불안, 개개인의 다양한 특성을 수용하지 못하는 사회정서, 자율과 창의성을 억제하는 과다한 규제정책에서 비롯되고 있다.

물론 탈코리아는 글로벌 경제에서 어쩔 수 없는 일시적 현상으로 치부할 수도 있다. 아직은 우리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이것은 우리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이런 현상이 구조적인 패턴으로 자리 잡기 전에 한국을 매력적인 나라로 만드는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해외 유출을 엄격히 단속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우선은 소외계층을 배려하되 부유층도 숨쉴 수 있게 하며, 부(富)가 국내에서 선순환될 수 있는 제도를 적극적으로 개발해야 한다. 대학만이라도 완전히 자율화해 다양한 입시제도를 개발한다면, 조기유학의 열풍은 쉽게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의 해외 탈출을 막는 대안도 역시 획기적인 규제철폐를 통한 시장자율에서 찾아야 한다.

▼‘매력적 한국’만들 전략 필요해▼

공자가 노나라의 혼란을 피해 제나라로 가던 중 무덤에서 슬피 우는 여인을 만나는 고사를 생각해 보자. 그 여인은 가혹한 정치를 피해 산으로 숨었다가 가족 모두가 호환(虎患)을 입었음에도 폭정이 호환보다 무섭다(苛政猛於虎·가정맹어호)고 말한다. 나라를 떠나는 것은 누구든 쉬운 결정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많은 사람과 기업이 모국을 떠나려 하는 마음을 진지하게 헤아려 보아야 한다. 사람과 기업과 자본이 빠져나가는 나라가 어떻게 부강해질 수 있겠는가.

정갑영 연세대 정보대학원장·경제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