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주5일근무제 본격 시행]노는 주말이 아니다

입력 | 2004-06-27 18:59:00


《다음달 1일부터 공기업과 금융보험업, 그리고 근로자 1000명 이상 사업장에서 주5일 근무제가 의무적으로 실시된다. 180만명에 가까운 근로자들이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주말’을 맞게 되는 것. 주5일 근무는 직장인들의 삶의 패턴과 산업 전반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다 줄 것으로 전망된다. 그러나 아무 준비 없이 이를 맞아들인다면 주5일 근무는 ‘주6일 근무’에 비해 ‘하루 더 노는 제도’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없다. 근무 시간이 줄어들면서 각 기업은 줄어든 시간만큼 인적 자원의 효율성을 중시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따라서 늘어난 여유 시간을 고스란히 노는 데 까먹는다면 경쟁에서 뒤처진 낙오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최근 늘어난 주말을 ‘제2의 인생’에 투자하려는 ‘주말 공부족’이 늘어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한 직장인의 실패기와 성공기=“석 달 동안 비디오를 보고 나니까 더 볼 영화가 없더군요. 빈둥대면 남는 건 비디오 가게 아저씨와의 ‘친분’뿐이죠.”

▶연재물 리스트로 바로가기

일본계 무역회사에서 과장으로 일하는 박모씨(34). 그는 1995년에 입사해 일찌감치 주5일 근무의 ‘단맛’을 보기 시작했다.

입사 초기 그의 토요일은 너무나 단조로웠다. 금요일에는 늦게까지 술을 마셨고 토요일 오전에는 늘 늦잠을 잤다. 행여 일찍 일어나면 무료함을 달랜답시고 비디오를 빌려서 봤다. 그렇게 단조롭게 3년이 흘렀다.

“대리 승진할 때쯤 되니까 회사 분위기가 이상해지더군요. 저만 몰랐는데 동기들이나 선후배들이 대부분 주말에 영어학원을 다니거나 컴퓨터 강좌를 듣고 있었습니다.”

당시는 외환위기 직후 경기 침체가 극에 달했던 1998년. 회사와 노조가 인원감축 협상을 실시하면서 희망퇴직을 받는다는 소식까지 들렸다. 박씨는 그제야 ‘내 주특기가 무엇이며, 나는 이래서 회사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내세울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 직장 선배도 그에게 “일본 회사는 사람 능력을 ‘세게’ 본다. 대리까지는 그냥 승진이 되지만 과장부터는 인사고과가 상당히 중요해지니 뭐든지 공부를 좀 해두라”고 조언했다.

7월부터 주5일 근무제가 본격 시행되면서 주말을 이용해 자기 계발에 나서는 직장인들이 늘고 있다. LG전자 사원들이 토요휴무일인 26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동 LG그룹 사옥에 나와 주말강좌를 듣고 있다.-이훈구기자

박씨는 그때부터 토요일 오전 한국회사 직장인들이 근무하는 시간만큼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다. 토요일 오전 4시간을 공부에 투자하면 1년에 210시간가량을 공부할 수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경쟁자들이 저보다 1년에 200시간 넘게 뭔가를 준비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10년 뒤 내가 부장 승진할 때쯤에는 경쟁자에 비해 2000시간이나 뒤져 있다는 이야기니까요.”

이후 그는 두 달에 한 번씩 토익시험을 치르기로 하고 열성적으로 준비해 2001년 목표했던 900점을 넘었다. 2002년부터는 초보회화가 가능하던 정도의 실력이었던 일본어 공부를 다시 시작해 지금은 어지간한 일본 논문을 속독할 수 있는 실력을 갖췄다.

그는 새로 주5일 근무를 시작하는 직장인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토요일 오전 공부는 근무만큼 중요하다는 원칙을 세워야 합니다. 예외를 두면 안 됩니다. 그러면 자연히 금요일 술 약속도 줄어들고 토요일 공부가 생활화됩니다.”

▽기업의 변화를 주목하라=주5일 근무가 시작되면 주말을 활용한 자기 계발은 ‘권고’가 아니라 ‘필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근로자의 근무시간이 줄어들면 기업은 인적자원의 효율성을 중시할 수밖에 없다. 능력이 없으면 도태되는 극단적인 경쟁 사회가 더 빨리 다가온다는 것.

LG경제연구원 이지평 연구위원은 주5일 근무가 시작될 경우 △실력 위주의 인사 강화 △가족적 기업문화 대신 개성과 창의력을 강조하는 문화 정착 △지적 부가가치 중시 등의 방향으로 경영 환경이 바뀔 것이라고 예측했다.

실제로 적지 않은 기업들이 주말을 이용한 자기 계발 강좌를 열어 놓고 직원들의 참여를 독려하고 있다.

국민은행은 경기 고양시 일산구 연수원에서 다양한 주말 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으며 영업점품질관리과정 연수에는 개인금융지점장 906명이 참여하고 있다.

LG전자도 온오프라인을 통해 연간 1000여개의 학습과정을 운영하고 있으며 지난해 토요일 학습과정 200여개 강좌는 무려 4000여명의 임직원이 강의를 들었다. 상반기가 거의 지난 올해에도 100여개 강좌에 1800여명이 수강을 완료한 상태.

삼성화재도 매주 토요일 오전 ‘글로벌 대학’이라는 외국어 회화 프로그램을 10주 과정으로 운영하는 등 직원들의 주말 활용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다.

이처럼 기업들이 앞 다퉈 직원들의 자기 계발을 돕는 것은 단순한 복지 확대 차원이 아니다. 기업들이 직원들의 지적 능력을 향상시켜 근무 효율성을 높이는 것이 부족해진 노동시간을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

한국디지털대 평생교육학과 염철현 교수는 “산업사회에서 여가는 일로 지친 심신을 쉬게 하는 ‘재충전’ 개념이었지만 지식사회에서의 ‘주 이틀 여가’는 자기 계발을 통해 지적 능력을 확대하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완배기자 roryrery@donga.com

박중현기자 sanjuck@donga.com

▼숫자로 본 주5일제▼

주5일 근무제가 도입되면 적지 않은 일상의 변화가 예상된다. 몇 가지 숫자로 주 5일제의 여러 측면을 살펴보자.

▼5.2

한국노동연구원은 주5일제가 도입되면 고용이 5.2% 증가할 것으로 예상

▼16

초과근로시간 한도가 현재 주당 12시간에서 16시간으로 확대. 3년간 한시 적용

▼15~25

연차휴가는 근속 1년차의 경우 15일이며 근속 2년마다 하루씩 늘어나지만 최대 25일을 넘을 수 없음

▼25

초과근로수당 할증률은 현재 50%이지만 앞으로 3년간 첫 4시간(주당)에 대해서는 25%를 적용. 4시간 이후 초과근로수당 할증률은 50%

▼27.7

대한상공회의소 조사에 따르면 주5일제를 하는 직장인들은 주말 여가활동 가운데 여행(27.7%)을 가장 많이 즐기는 것으로 나타남

▼62.2

문화관광부 조사에 따르면 직장인 응답자의 62.2%가 주5일제에 따른 부정적인 변화로 경제적 부담을 꼽음

▼143~163

현행 휴가제도를 그대로 둔 채 주5일제만 시행할 경우 예상되는 연간 휴일 휴가일수. 개정 근로기준법은 월차휴가를 폐지하고 연차휴가를 축소

▼1000

근로자 1000인 이상의 대기업은 주5일제 의무 적용 대상. 공기업과 정부산하기관, 금융보험업종도 주5일제 대상

▼26만7000

대한상공회의소 조사에 따르면 주5일제를 하는 기업 직원의 한달 평균 여가비용은 26만7000원. 주5일제를 하지 않는 기업 직원의 한달 평균 여가비용은 22만2780원

▼8374

7월부터 주5일제를 실시하는 전체 기업 수

▼22만2000

공공부문에서 주5일제를 도입하는 사업장은 282개이며 대상인원은 22만2000명

▼179만8000

7월부터 주5일제 근무를 하는 전체 직장인 수는 179만8000여명

이종훈기자 taylor5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