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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서…역사와의 대화]안동 윤매의 ‘자매문기’

입력 | 2004-06-28 18:31:00


“제 집안은 본래부터 빈궁하고 가까운 친족도 없습니다. 그러던 차에 을해년(1815년) 대기근을 만나 아버지가 외지에서 유랑하며 걸식하다가 그만 수 백리 밖에서 객사하고 말았습니다.”

지금부터 190년 전, 기근으로 객지에서 죽은 아버지의 장례를 제대로 치를 수 있도록 도움을 청하는 한 아들의 호소는 이렇게 시작한다.

순조14년(1814년)과 15년(1815년) 두 해에 걸쳐 큰 홍수가 발생한 경상도 안동 지례(현 안동시 임동면 지례리)에 윤매(允每)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집이 홍수에 이은 기근으로 풍비박산이 나자 1990년대 말 외환위기 때 이 땅의 가장들처럼 윤매의 아버지는 양식을 구하기 위해 타지로 유랑걸식을 떠났던 모양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아버지는 객지에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윤매는 아버지의 시신을 모셔와 장례를 치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속수무책이 되자 자신을 노비로 팔기로 결심한다.

의성김씨(義城金氏) 지촌종가(芝村宗家)에서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한 고문서 가운데는 이 일과 관련된 일련의 문서들이 들어 있어, 당시 애끓는 한 효자의 심정을 엿보게 한다. 문서는 모두 세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하나는 윤매가 자신을 노비로 판다는 것을 약속하는 ‘자매문기(自賣文記)’이고, 또 하나는 이 계약을 허락해줄 것을 관청에 요청하는 청원서인 ‘소지(所志)’, 나머지 하나는 이를 수락한다는 관청의 공증문서인 ‘입안(立案)’이다.

자매문기를 보면 당시 윤매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자신을 지촌종가에 30냥에 팔 뿐 아니라 자신의 후손들도 대대로 이 집의 노비가 되게 하겠다고 약속한다. 이 계약은 순조 15년(1815) 3월16일자로 맺어졌으며(연호는 1814년에 해당하는 가경·嘉慶 19년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착오로 보인다), 상대측 계약자는 지촌종가의 노비였던 일손(日孫)이었다.

매수자가 일손이라는 노비로 되어 있는 것은 양반가에서 토지나 노비를 매매할 때는 노비를 시켜 계약을 하도록 한 당시의 관례 때문이었다. 문서의 끝 부분 하단에는 글을 몰랐던 윤매가 자신의 왼손바닥을 그려 서명으로 대신하고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이것을 수장(手掌)이라고 한다.

조선 후기의 문서 중에는 이처럼 서민들의 고된 삶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해주는 자매문기가 많이 발견된다. 예나 지금이나 없는 사람들에겐 몸이 마지막 ‘밑천’인 모양이다.

박원재 한국국학진흥원 수석연구원·동양철학


윤매의 ‘자매문기’ 관련 문서들. 왼쪽이 매매 허락을 청하는 ‘소지’, 가운데 손바닥 그림이 있는 문서가 ‘자매문기’, 오른쪽에 도장이 찍힌 것이 관청에서 해당 매매 건을 공증하는 ‘입안’이다.-사진제공 한국국학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