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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큰바람 불고 구름 일더니卷四. 흙먼지말아 일으키며

입력 | 2004-06-28 18:33:00


맞바람(1)

서초패왕(西楚覇王) 항우가 관중을 떠나 도읍인 팽성으로 군사를 돌린 것은 한(漢) 원년(元年) 4월 하순이었다. 희수(戱水) 가에 모였던 제후들이 저마다 탈 없이 봉지(封地)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군사를 돌리다 보니 출발이 남보다 보름 넘게 늦어졌지만, 당장은 모든 것이 자신의 뜻대로 이루어져 돌아가는 패왕의 호기는 한껏 치솟았다.

그런데 패왕이 홍문을 떠나려는 날 아침 그 호기에 찬물을 끼얹는 일이 있었다. 오중(吳中)부터 패왕의 전마(戰馬)를 도맡아 돌봐온 구장(廐將)이 찾아와 겁먹은 얼굴로 말했다.

“대왕께서는 새로이 싸움 말을 고르셔야겠습니다. 간밤에 오추마(烏추馬)가 죽었습니다.”

“무어라? 오추마가 죽었다고?”

패왕이 자신도 모르게 떨리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오추마에 대한 패왕의 정은 남달랐다. 오중에서 얻어 전마로 탄지 3년. 힘든 싸움터마다 한몸이 되어 달려준 말이었다. 거록(鉅鹿)에서의 피투성이 싸움부터 마지막 함곡관을 두드려 부술 때까지 크고 작은 수십번의 싸움에서 언제나 패왕이 이길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의 빼어난 용력 못지않게 오추마의 도움도 컸다.

“그렇습니다. 끝내 여물도 꼴도 마다하고 자진(自盡)하였습니다.”

구장이 마치 비장하게 죽은 사람 얘기를 하듯 그렇게 말했다. 그게 가슴 서늘하면서도 패왕이 짐짓 꾸짖듯 말했다.

“자진이라니? 구장은 말 못하는 짐승을 두고 무슨 당치 않은 소리인가?”

“오추마는 말 못하는 짐승이었으나, 그래도 여느 말은 아니었습니다. 대왕의 패업을 돕기 위해 하늘이 내리신 천마(天馬)였습니다”

“나도 오추마가 병들어 거동이 어렵게 되었다는 얘기는 들었다. 그럼 그게 병든 게 아니고 스스로 먹기를 마다하고 죽은 것이란 말이냐?”

“대왕이 걱정하실까 저어하여 숨겨왔으나, 실은 그랬습니다.”

“그럼 오추마가 언제부터 먹지 않았느냐?”

“대왕께서 함양에 드신 뒤로 먹는 게 신통치 않더니, 홍문의 진채로 되돌아 오신 뒤로는 아예 꼴도 여물도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구장의 말에 실린 묘한 여운이 패왕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러나 패왕은 은근히 치솟는 화를 억누르며 별 억양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평소에 백락(伯樂)을 자처하며 말에 관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안다고 하였다. 천마도 말이니, 그럼 천마인 오추마가 스스로 죽기를 바라며 먹기를 그만둔 까닭도 알겠구나.”

“그것은 하늘의 뜻이니, 저같이 하찮은 것이 하늘의 뜻을 어찌 알겠습니까마는 대략 짚이는 바가 없지는 않습니다.”

“내가 함양에 들어가 한 일이라면 진왕(秦王) 자영(子영)을 죽이고 함양을 도륙한 것이며, 얻은 것은 진나라의 재보와 우미인(虞美人)이었다. 그럼 입맛을 잃을 만큼 오추마가 처음 못마땅하게 여긴 일은 그것들이겠구나.”

그때 패왕은 왕으로서 우희(虞姬)를 미인(美人·後宮의 한 직급)에 봉한 뒤였다. 그렇게 말하는 패왕의 두 눈에 이는 흉흉한 불길을 보고 비로소 구장의 낯빛이 변했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