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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안보 시스템 겉돈다]국민 의식도 달라져야

입력 | 2004-06-30 18:54:00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중심으로 한 정부의 외교안보시스템이 ‘국가안전의 중추’라면 국민은 ‘국가안전의 말초신경’과도 같다.

말초신경이 고장 나면 중추에 정확한 상황과 정보가 전달되지 못한다. 김선일씨 피살사건은 말초신경(국민)과 중추(정부시스템)간의 신호 전달이 원활하지 못했던 대표적 사례.

정부 관계자와 전문가들은 “김선일씨의 비극적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려면 이젠 국민 개개인이 자신의 안전문제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의 재외국민 보호 업무에 허점이 많은 게 사실이지만 평소엔 안전 문제에 신경 쓰지 않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정부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한다’고 우기는 일부 국민의 행태에도 문제가 있다는 지적이다.

▽억지 주장에 난감한 재외공관=주일 한국대사관이나 영사관은 일본 당국에 체포된 한국인 불법체류자 가족들의 항의를 하루도 안 받는 날이 없다. ‘불법체류’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는 대신, 공관측에 “자국민이 다른 나라 경찰에 체포됐는데도 천하태평이냐”고 호통 치기 일쑤라고 한 관계자는 전했다.

최근 미국 동부 지역의 한 영사관엔 중년여성이 “살해 위협을 받고 있으니 보호해 달라”고 요청해 왔다. 영사관측은 긴급히 직원의 집을 며칠간 보호처로 제공했으나 사실은 이 여성이 남편과의 불화로 가출한 사실을 알고 허탈해 했다.

유럽 공관에 근무하는 영사 A씨는 한국인 배낭여행객이 밀려오는 휴가철만 되면 “지갑과 여권을 도둑 맞았으니 사건 일체를 처리해 달라”는 민원전화에 시달린다. A씨는 “거리가 너무 먼 곳에 있는 민원인에겐 ‘그곳에 찾아가면 다른 영사 업무에 큰 지장이 있다’고 설명해도 ‘세금 받고 뭐 하는 것이냐’며 막무가내인 경우가 적지 않다”고 토로했다.

재외공관을 가장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일부 선교사나 비정부기구(NGO) 활동가들의 ‘의도적인 위험 행보’이다. 한 중견외교관은 “이들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신앙이나 가치를 이루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는 경우가 많다”며 “만일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면 본인들에겐 ‘순교’이고 ‘숭고한 희생’이지만 정부는 ‘재외국민 보호가 구멍 났다’는 비판만 받게 된다”고 토로했다.

▽한국은 아직 선진국이 아니다=국민이면 누구나 선진국의 ‘체계 있는 재외국민보호’를 원한다. 그러나 한국의 외교 인력이나 능력은 그런 수요를 충족시키기엔 역부족인 측면이 없지 않다. 한국에서 인구 100만명당 외교 인력은 33명. 한국과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비슷한 덴마크(335명) 네덜란드(191명) 벨기에(172명) 스페인(140명)에 비해 크게 뒤처진다.

그만큼 국민이 정부 대신 메워야 할 ‘안보 공백’이 많다는 의미도 된다.

외교부 한훈(韓熏) 재외국민보호센터소장은 “해외 체류시 재외공관에 자신의 소재와 행선지, 연락처만 사전에 알려줘도 만일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신속한 조치가 가능하다”며 “그러나 현실은 국내 가족조차 그런 기초적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말했다.

▽국가 안보의 총체적 점검 필요=김선일씨 사건은 초국가적 범죄인 테러 위협에서 한국민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일깨워줬다.

익명을 요구한 한 전문가는 “테러리스트들이 ‘전문가’라면, 정부와 국민의 대테러 인식과 대책은 ‘너무나 아마추어적’이었다는 사실이 명백히 드러났다”며 외교부의 쇄신만으로 비극의 재발을 막을 수 없는 만큼 국가적 국민적 차원의 대응책 마련이 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

▼"해외공관 민원땐 can과 cannot 구분해 주세요"▼

외교통상부는 최근 재외국민 보호와 관련해 ‘정부가 도와줄 수 있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을 구분해 적극 홍보하기 시작했다. 영사 및 민원 업무를 둘러싼 갈등이 ‘정부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민원인이 해달라고 요청할 때 주로 발생한다’는 판단에 따른 것.

예컨대 해외에서 빈번하게 일어나는 ‘여권이나 소지품 분실’의 경우 재외 공관은 피해자에게 △사건을 신고할 현지 관할경찰서의 연락처와 신고방법 △국내 가족으로부터 송금 받는 방법 등을 ‘안내’해 줄 수 있지만 직접 분실물을 찾아 나서거나, 범인 체포에 앞장설 순 없다는 것이다.

한 중견 외교관은 “자신의 부주의로 돈을 잃어버리거나 도둑맞은 뒤 ‘공관에서 숙식비와 항공료까지 전부 책임져 달라’고 생떼를 쓰는 민원인이 의외로 많다”며 “절박한 심정은 이해하지만, 그런 요구를 충족시킬 정부 예산은 있을 수 없다”고 말했다.

여행자가 다치거나 사망했을 때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국인이 많이 다니는 현지 의료기관을 소개하거나, 국내 가족의 조속한 현지 도착을 행정적으로 지원하는 수준이다.

그러나 민원인들은 의료비나 환자 이송비 부담은 물론 상대방과의 보상 교섭까지 공관이 떠맡아 주길 바라는 경우가 종종 있다.

외국에서 체포되거나 구금됐을 때 한국공관은 변호사나 통역 선임을 위한 정보나 편의를 제공할 수 있다. 국내 가족과의 연락도 주선해 준다. 그러나 변호사비나 소송비를 부담하거나 수사 및 재판 과정에 직접 개입할 수는 없다.

정부의 주장처럼 ‘할 수 없는 일을 요구하는 민원인’도 있지만, ‘외교관이 할 수 있는 일도 안 한다’고 느끼는 재외국민도 적지 않다. 따라서 국민도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부형권기자 bookum90@donga.com

도쿄=조헌주특파원 hans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