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세계 12대 경제대국이다. 이제 지구상에 우리 국민이 나가서 경제활동을 하지 않는 곳이 없다. 이들의 생명과 재산을 확실하게 보호하는 것이 대한민국 정부의 책무다. 그러라고 국민은 세금 내고 자녀들을 군에 보낸다.
그러나 국민은 이번 김선일씨의 비극적 사건에서 위정자들이 보여준 나약하고 무능한 모습을 보며 실망한다. 김씨가 이미 사망한 시점인 6월 22일 오후 10시 노무현 대통령이 외교통상부에서 “희망적이다”는 보고를 받은 것이나, AP통신으로부터 김씨 피랍 사실 확인 요청을 받은 외교통상부의 허술한 대응은 우리 위기대응능력의 실상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이제라도 전 지구촌을 상대로 한 국가위기관리 체제를 획기적으로 정비해야 한다. 위기관리체제는 국가의 존망, 국민의 생명·재산 보전의 문제와 직결된다.
우선 국가정보원의 대외정보수집 능력을 획기적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정권과의 친소에 따른 코드 인사와 관료주의 인사를 탈피해 능력 위주의 인사체계를 확립해야 한다. 그리고 위기 때 체계적 종합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대테러 통제기구를 조속히 만들어야 한다. 외교부 등 각 기관의 산발적 노력으로는 밀행성(密行性)과 순발력을 요하는 위기사태에 제대로 대처할 수 없다.
외국의 대테러기관들이 위기 때 어떻게 하는지 보라. 1984년 3월 18일 미국인 7명이 헤즈볼라라는 테러집단에 의해 이란에 납치됐다. 윌리엄 케이시 당시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은 ‘테러집단과는 흥정하지 않는다’는 정부 방침을 어기고 수출통제 대상국인 이란에 최신예 토미사일 등을 판매하는 비밀협정을 맺고 인질을 구출했다. 무기수출통제법 위반으로 감옥행을 각오한 작전이었고, 실제로 나중에 이것이 문제가 돼 관계자들이 모두 법정에 서야 했다. 실정법 위반이라는 측면에서는 비판의 여지가 있지만 자국민의 생명 보호와 국익을 위해 국가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만든 사건임에 틀림없다.
1976년 6월 27일, 테러리스트에 의해 납치돼 우간다 엔테베 공항에 착륙한 민간여객기를 기습, 승객을 무사히 구출해낸 ‘엔테베 작전’도 이스라엘 모사드의 뛰어난 정보수집 능력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런 모습들을 보면서 국민은 그 나라의 국민됨을 자랑스러워하고 애국심에 충만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지난해 국정원은 테러방지법 제정을 추진했다. 국정원 산하에 테러 관계기관 합동의 대테러센터를 설치해 테러 관련 정보 수집과 기획조정업무를 총괄토록 한다는 것이 그 골자다. 인권침해 우려 조항을 일부 삭제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정보위원회를 통과했지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열린우리당 의원 전원의 반대에 직면했다. 보수정당이라는 한나라당까지 “우리가 총대 멜 필요 없다”며 덩달아 반대하는 바람에 결국 폐기됐다.
사후약방문이기는 하지만 열린우리당에서 이 법의 제정을 다시 추진한다는 얘기가 나온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국가의 위기관리체제는 애국심과 국민적 자존심의 문제이기도 하다. 기왕 테러방지법을 제정할 것이라면 제대로 된 테러대응기구를 만들기를 기대한다.
함승희 변호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