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은 편향적인 보도 태도로 논란이 되고 있는 MBC ‘신강균 뉴스서비스 사실은’(위)과KBS1 ‘미디어 포커스’. 오른쪽은 한 보수단체가 3월 19일 서울 여의도 KBS 본관 앞에서 탄핵방송이 편파적이라며 벌였던 집회다.-동아일보 자료사진
《방송의 공정성이란 무엇이고 어떻게 검증해야 하는가? 탄핵방송의 공정성 여부를 둘러싼 논란은 방송법에 규정된 공정성 조항을 현실에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던졌다. 탄핵 찬반 여론을 균등하게 보도해야 한다는 주장과 탄핵반대 여론이 우세하니 기계적 균형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 탄핵은 일탈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므로 공정성에 집착하지 않아도 된다는 견해와 합법적 논쟁의 영역이므로 공정해야 한다는 견해도 서로 대립했다. 그러나 이번 논란에 대해 최종 판단을 내려야 할 방송위원회는 1일 “심의할 수 없다”며 공정성에 대한 논의 자체를 포기했다. 저널리즘을 전공한 이재경 이화여대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48)와 방송법과 제도를 전공한 최양수 연세대 영상대학원장(49)이 방송의 공정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 공정성이 아니라 진실성의 문제
▽최양수=공정성은 언론이 추구해야 할 다양한 가치 중의 하나다. 그런데 현실의 이해 갈등이 공정성을 사회적 쟁점으로 부각시켰다. 공정성을 추구해야 하지만 그 완전한 달성은 불가능하다. 공정성을 정도의 문제로 인식했으면 이번 논란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이재경=미국 언론인 빌 코바치와 톰 로젠스틸은 ‘저널리즘의 기본 요소’라는 책에서 공정성은 구현하기 어려운 가치라고 주장했다. 가능하면 진실에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게 더 의미 있다는 것이다. 저널리스트는 사실 그대로 쓰면 되는데 공정성을 먼저 생각하다가 사실을 비틀어 버릴 수도 있다.
▽최=공정성은 신문보다 방송에 더 요구된다. 방송은 공중의 자산인 전파를 이용하기 때문에 더 높은 수준의 공정성이 요구된다. 미국에서도 신문은 특정 후보를 지지하지만 방송에서는 그런 관행이 거의 없다.
▽이=공정성은 저널리스트의 양심에 맡겨야 한다. 한쪽의 입장을 치켜세우거나 누락해서는 안 된다. 월터 리프먼은 “사람들이 사실을 먼저 보고 나서 정의하는 게 아니라 정의부터 하고 접근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기자들까지 이런 상황이라면 공론의 장이 무의미하다.
▽최=미국 방송사는 법이 요구하지 않더라도 대통령의 연두교서 발표 직후 관행적으로 야당에도 일정 시간의 연설 기회를 준다. 이는 광고 수입의 감소를 무릅쓰고 하는 것이다. 방송에 대한 신뢰는 이렇게 쌓이는 것이다.
▽이=한국 언론은 관찰자가 아니고 행위 참여자 또는 선도자의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저널리즘의 기본적 가치는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방송은 운동가적인 시각으로 한쪽으로 몰고 가는 인상을 준다. 도덕적 정당성을 확신하다 보니 다른 의견을 수용할 준비가 돼있지 않다.
● 공정성 시비가 남긴 것
▽최=상대의 의도에 집착하면 논의가 진전되지 못한다. 한국언론학회 보고서에 대해 방송사들이 연구진의 성향을 문제 삼으며 반발하는 것도 그렇다. 이렇게 되면 방송위원회, 기자, PD의 성향도 마찬가지다. 전문가로서 수행한 일은 구체적 증거를 갖고 반박해야 한다.
▽이=보고서는 다양한 틀을 통해 탄핵방송을 객관적으로 분석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방송사들에 이 보고서를 읽어보게 한 뒤 그들의 의견을 넣어 발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최=보고서의 분석 수준이 높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다른 연구자가 했을 때 다른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갈등이 증폭됐다.
▽이=탄핵방송에 관한 쟁점 중 하나가 탄핵이 합법적 논쟁의 영역인가, 일탈의 영역인가 하는 것이다. 다니엘 할린의 저서에 따르면 3가지 보도영역이 있는데 첫째가 합의의 영역이다. 가령 9·11테러 같은 사건이 일어나면 테러리스트에 반론을 주지 않는다. 둘째가 정당한(legitimate) 논쟁의 영역이고, 마지막이 들을 만한 가치가 없는 영역이다. 미국 방송들이 공산주의자의 반론은 듣지 않는다는 게 마지막 영역의 사례다. 그런데 이들 영역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으며 지배계층의 합의가 존재할 때 미디어 보도에 갈등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즉 지배계층이 갈라져 있으면 보도도 갈등이 많다. 사회의 흐름이 매체의 행위를 결정하는 것이다. 보고서를 비판하는 이들은 탄핵을 일탈적 영역이라고 주장하는데 이 논리에 따르면 탄핵을 주장한 이들은 테러리스트에 가깝다는 이야기가 아닌가.
▽최=현실의 이해 갈등이 학계, 언론계, 방송위와 같은 공적 논의의 장으로 침범하는 것이 위기다. 그렇게 되면 합의는 아니라도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절차가 사라진다.
▽이=지식인들은 자기 이익을 초월해야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역사가 짧아서인지 우리는 서로 피해의식에 젖어 다른 입장을 배려하지 않는다. 방송의 토론 프로그램에서도 극단적 주장으로 서로 각을 세운다. 재미는 있겠지만 합의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다. 말에 주목하지 않고 말한 사람에 주목하는 비판이 구조화되면 서로 말문이 막히는 법이다.
▽최=한국인은 모호성을 견디지 못한다. 언론은 더하다. 모든 것에 답을 내놓으려 한다. 이분법적 사고는 독자와 시청자를 모으는 데는 좋다. 그러나 미디어가 발달한 미국에서는 오랜 전통 속에 쌓인 저널리즘에 대한 신뢰와 전문가적 의식이 이분법적 사고의 폐단을 방지한다.
▽이=한국인들은 자아의식이 너무 강하다. 언론들도 다 입장이 있다. 기자는 보도하는 것인데 어떤 틀에서 이 문제를 볼 것인가를 먼저 생각하고, 거기에 맞는 사실만 배열하기도 한다. 매우 위험하다.
▽최=탄핵방송을 둘러싼 논란에선 모두가 패배자다. 현실의 이해 갈등이 정치와 무관한 것들까지 정치적으로 변질시켜 버렸다. 학자나 기자가 모두 순수성과 전문성을 의심받는 상황이 됐다. 방송위는 더 말할 나위도 없다.
대담결과 : 대담은 방송의 공정성 문제에서 출발해 언론 전반의 공정성, 나아가 한국 사회의 이해 갈등에 대한 토론으로 확대됐다. 두 교수는 현실정치의 갈등이 계속해서 언론이나 학계에 침투하는 한 어떠한 사회적 합의도 이뤄내기 어려울 것이라고 걱정했다. 두 교수는 특히 방송은 더 높은 수준의 공정성을 요구받지만 한국 방송의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지적했다.
정리=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김선우기자 sublim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