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적 프로레슬러 역도산의 치열한 삶과 죽음을 다룬 영화 ‘역도산’에서 주연을 맡은 설경구. 사진제공 싸이더스
6일 오후 일본 히로시마 현 다케하라 시의 전통가옥.
영화 ‘역도산’의 촬영이 한창인 이곳에는 마치 전설적 프로레슬러가 되살아난 듯했다. 역도산은 거구의 미국 레슬러들을 쓰러뜨려 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일본인들에게 ‘천황 아래 역도산’이라는 말을 유행시킬 정도로 희망과 용기를 준 우상이었다.
이날은 스모로 성공하기 위해 1941년 16세의 나이로 혈혈단신 고향을 떠난 조선인 청년, 훗날 역도산이 되는 김신락의 젊은 시절을 촬영했다. 역도산은 1963년 12월15일 야쿠자의 칼에 찔려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오늘 이후로 한번만 더 귀찮게 굴면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러니까 선배가 날 좀 도와줘.”
평소 몸무게보다 21kg나 늘려 94kg의 거구가 된 역도산 역의 설경구(36)는 자신을 괴롭히던 스모 도장 선배를 찍어 누르며 분노를 토해내고 있었다.
“컷!”
연출을 맡은 송해성 감독의 사인과 함께 역도산의 하루가 끝났다. 땀이 식지 않은 채 거친 숨을 내쉬는 설경구를 현장에서 만났다.
―‘실미도’ 때랑 얼굴이 달라 못 알아보겠다(웃음).
“평소 체중이 73kg인데 ‘공공의 적’ 때 89kg까지 늘렸고 이번에 다시 기록을 깼다. 발톱 깎는 데 손이 발까지 닿지 않더라.”
―역도산을 어떤 인물로 보나.
“이 영화에서 보여주려고 하는 것은 영웅이 아니라 인간 역도산이다. 10대 때 성공하려고 혈혈단신 건너온 조선인이 성공하려고 했다면 어떤 선택을 했겠는가. 그건 집념과 비원이다. 성공에 매달려 다른 모든 것을 희생시킨 그의 삶이 안타까웠다.”
―레슬링 장면은.
“현재는 기본적 동작만 익혔다. 한국에서 본격적 훈련과 함께 레슬링 장면도 찍을 것 같다. 일본 프로레슬러에게 지도받으면서 느낀 것은 레슬링이 쇼가 아니란 점이다. 어느 운동보다 거칠고 고도의 테크닉이 필요하다.”
―작품마다 너무 강한 캐릭터에 몰두한다는 평가가 있는데.
“평론가나 기자들이 ‘나쁜’ 사람들이다(웃음).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에서 평범한 소시민 캐릭터를 보여줬다. 그때는 뭔가 느낌이 약하다고 했다. 어쩌란 말인가? ‘박하사탕’ ‘실미도’, 같은 설경구지만 작품마다 다른 설경구를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닌가.”
이번 작품에는 이와이 순지 감독의 ‘러브 레터’와 칸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한 에드워드 양 감독의 ‘하나 그리고 둘’의 프로듀서를 맡았던 가와이 신야가 일본 측 제작자로 참여했고, ‘링’ 시리즈의 나카타니 미키가 역도산의 아내로 출연한다. 90억원의 제작비가 투입되는 이 작품은 역도산이 타계한 12월15일 개봉될 예정이다.
○먹고 자고 놀고… 설경구 몸집불리기 120일 작전
영화 ‘역도산’은 역도산에 ‘미친’ 세 남자가 한 남자를 만들어가는 영화다.
“역도산 못 해요.” (설경구) “너 말고는 다른 배우 생각한 적 없다.” (송해성 감독) “나는 너 말고, 한 사람 있다.” (싸이더스 차승재 대표)
지난해 세 사람은 이 영화를 놓고 여러 차례 입씨름을 벌였다. 차 대표가 말한 또 다른 후보는 바로 자신이다. 평소 체중이 90kg 안팎으로 ‘역도산 급’이라는 것이다. 농담 섞인 말로 설경구 외에는 대안이 없다는 강력한 설득이었다.
작품이 탐나면서도 체중과 강한 캐릭터 등의 부담 때문에 망설이던 설경구는 “너 아니면 영화가 엎어진다(사라진다)”는 말에 백기를 들었다. 그는 캐스팅이 확정되자 체중을 늘렸고 개인교습을 통해 일본어를 배웠다. 4개월간 새벽까지 술 마시고 푹 자고 일어나 밥을 무조건 먹는 ‘무위도식형’ 생활의 반복으로 85kg까지 늘렸다. 프로레슬러에 어울리는 근육을 만들기 위해 운동을 병행했다. 이 같은 사정 때문에 설경구와 차 대표 사이에는 문서화되지 않은 구두 계약이 있다. 영화가 끝나면 설경구의 몸이 정상으로 회복되도록 ‘애프터서비스’를 책임진다는 것. 캐스팅 외에도 다른 난관이 있었다. 2001년 4월 송 감독과 차 대표가 ‘역도산’을 기획했을 당시 일본에서도 5개 팀이 같은 소재의 영화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중 차 대표와 친분이 있는 가와이 신야도 포함됐다. 또 하나의 승부수가 던져졌다. “어느 쪽 시나리오가 좋은지 한번 보자.” 결국 가와이가 백기를 들고 ‘역도산’의 공동제작자로 합류했다.
히로시마=김갑식기자 dunanworld@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