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자료사진
상영 중인 영화 ‘슈렉 2’를 보고난 뒤 내게 풀리지 않았던 의문은 영화 끝부분에서 왜 피오나 공주가 자신과 슈렉의 외양을 괴물의 모습으로 되돌려 놓기로 결심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녀는 기왕에 사람의 모습이 된 슈렉과 함께 ‘겁나 먼 왕국’의 공주로 사는 게 싫었던 걸까. 그녀의 결혼을 축복하는 노래 ‘리빙 라 비다 로카’의 신나는 리듬은 울려 퍼졌지만, 그녀가 그렇게 마냥 축하할 만한 결정을 한 것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앞으로 그녀는 초록 아기들을 낳은 뒤 후회하게 될 수도 있고, 동화책을 찢어 뒤를 닦는 화장실이 싫어질 수도 있다. 늪에서 잡은 동물들이 아니라 누군가 차려주는 최고의 음식들을 우아하게 먹고 싶을 수도 있으며, 지저분한 짓을 골라 하며 교양이라곤 털끝만치도 없는 남편이 지겨워질 수도 있다.
그녀의 결정이 슈렉의 본성을 존중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일방적인 희생이 오래 행복하기는 어렵다. 그것이 꼭 불행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녀가 현실과 마주하는 것은 어쩌면 영화가 끝난 뒤부터다. 만약 내가 피오나 공주였다면, 슈렉과 같은 존재가 되어 늪으로 내려가기보다는 사람과 어울려 사는 데 필요한 기본적 예절과 기술을 가르쳐 줌으로써 슈렉을 업그레이드시키는 ‘평강공주의 방식’을 택했을 것 같다.
기존의 동화 비틀기로 시작된 영화 ‘슈렉 2’는 되레 사람이 자신의 짝이 될 상대에게 끌리는 과정은 맹목적이며, 합리적 이유 같은 건 없다는 사실을 드러내 놓고 인정하고 있다. 사랑에 빠질 때 우리는 상대를 객관적으로 보는 대신 ‘콩깍지가 씐 눈’, 즉 내 마음의 눈을 통해 어떤 일면을 바라본다. 타인에게서 어린 시절에 내게 중요했던 사람의 면면을 발견하거나, 항상 바랐지만 채울 수 없었던 소망을 충족시켜줄 수 있을 것으로 느껴질 때 우리는 사랑에 빠진다. 외모의 매력이나 능력에 끌리는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다. 또 어떨 때는 내게 상처를 주었던 관계를 재현할 대상과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내가 가진 어떤 면이 타인에게서 발견될 때 사랑하게 되기도 한다. 그것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일어나며, 어떨 때는 우리를 과거의 함정에 빠뜨리기도 한다.
피오나 공주가 슈렉과 사랑에 빠지고 결국 괴물로 살기로 결심한 것은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괴물로 키워져 왔기 때문이 아닐까. 그녀가 “괴물이 되는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어린 시절에 갖고 있었던 부족하고 나쁜 면들에 대한 은유일지 모른다. 부모가 그것을 받아들이기보다 유폐해 버리고 외부에서 해결책을 찾고자 했기 때문에 그녀는 스스로를 공주의 외양을 한 괴물 정도로 여길 수밖에 없었고, 평생을 그런 모습으로 살겠다는 선택을 하게 된 것은 아닐까. 알고 보면 세상의 많은 딸들(즉 공주들)은 그 성별이 알려지는 순간부터 그런 부족한 부분을 타고 난 것과 같은 취급을 받아 오지 않았나.
사실 피오나 공주를 곤란에 빠뜨린 모든 책임은 공주의 배필이 될 후보들을 ‘잘생기고 못된 속물’과 ‘못 생기고 선량한 인물’로 이분법적 묘사를 하는 데에 있다(1편의 파콰드 영주까지 포함하면 ‘못생기고 못된 인물’까지 삼파전이었지만!). 하지만 실제로 외모와 성품이 꼭 그렇게 이율배반적인 것만은 아니다. 그것 역시 개개인이 타고난 자산의 차이를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낳은 환상이다.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에서 보통 정도의 외모에 그럭저럭 괜찮은 성품을 가진 주인공을 좀 발견하게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있다.
유희정 정신과 전문의·경상대 병원 hjyoomd@unite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