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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 전엔…]동아일보로 본 7월 셋째주

입력 | 2004-07-11 18:54:00

1953년 말 미군 당국이 한국 병원에 대한 혈액 공급을 중단하면서 당국은 군을 중심으로 헌혈운동을 벌여 부족한 혈액을 충당하려 했으나 막상 군인들의 헌혈 참가율은 상당히 저조했다. 1954년 수도육군병원에서 한 군인이 헌혈하고 있는 모습.-대한적십자사 제공


▼‘피’를 뽑아 ‘배움’의 길로-血液金庫에서 본 학생 ‘알바이트’▼

전란으로 인하여 향학심에 불타는 수많은 젊은 학생들이 구두닦이 혹은 식당 ‘뽀이’ 노릇 등 각종의 ‘알바이트’로서 진리를 탐구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고학생들의 ‘알바이트’는 발족한 지 불과 一개월 미만이 되는 ‘혈액은행’에도 뻗치고 있다.

발족한 지 근 一개월이 되는 국립중앙혈액은행에서는 그동안 약 一백五십 명이 채혈(採血)을 하였는데 채혈자의 九십 ‘퍼-센트’ 이상이 ‘고학생’이었다고 한다. 이들 고학생들의 태반은 중·고등학생이라고 하는데 그 중에는 여자학생도 반수에 달하고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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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고학생들 ‘매혈 아르바이트’▼

“주먹을 폈다가 꽉 쥐면 피가 뿜어 나간다. 주먹을 20번쯤 쥐었다 폈다 하는 데 2, 3분 정도 걸린다. 50환…100환…200환…950환…1000환. 380mL. 미지근한 체온이 남아 있는 채혈병을 집어든 간호원이 돈을 찾는 쪽지를 건네준다.”

전후 한 잡지에 실린 어느 매혈(賣血) 고학생의 수기 중 일부다. 1954년 국립중앙혈액은행과 몇몇 사립병원의 혈액은행들이 생겨났다. 이곳에서 피 380mL를 빼면 현금 1000환과 미군용 쇠고기 통조림 한 통을 손에 쥘 수 있었다. 1954∼56년 국립중앙혈액은행을 찾은 5489명의 매혈자 중 학생은 1411명(26%)으로 무직자(1935명) 다음으로 많았다. 1956년 2월 혈액은행에서 피를 팔고 가던 한 대학생이 길거리에 쓰러져 숨진 일도 있었다.

학비는 모자라고 일자리는 마땅치 않은 고학생들이 매혈에 나섰던 것. 워낙 매혈자가 많다보니 관련 은어까지 생겼다. 유리병에 피가 빨려 들어갈 때 나는 소리를 빗대 매혈을 ‘쪼록’이라고 불렀고 10∼15일에 한번씩 피를 파는 상습 매혈자들은 ‘귀신’으로 통했다.

매혈이 이처럼 성행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6·25전쟁 당시 미국에서 혈액을 공수해 와 미군 및 한국 병원에 공급했던 미군은 1953년 말 이 혈액을 미군에 국한해 사용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한국 병원들은 혈액 기근에 봉착했지만 당시 국내에선 ‘헌혈’이 생소해 매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1974년 ‘세계 헌혈의 해’를 맞아 대한적십자사가 대대적인 헌혈 캠페인을 벌이면서 매혈은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1981년엔 혈액관리법이 개정돼 매혈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1000만원 이하의 벌금을 감수해야 하는 범죄가 됐다. ‘아르바이트’에서 시작해 ‘범죄’가 되기까지 한 세대가 채 걸리지 않은 셈이다.

정미경기자 micke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