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 실시된 일본 참의원 선거에서 제1 야당인 민주당이 약진하면서 집권 자민당이 심판 전원 일치는 아니지만 ‘판정패’를 함에 따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2001년 4월 집권 이후 최대의 정치적 위기에 봉착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이날 밤 “정권 선택은 작년 11월의 중의원 선거 때 결정된 것”이라며 “여당이 과반수를 유지하고 있는 이상 누구도 책임을 져야 할 이유가 없다”면서 총리직에서 물러나지 않을 뜻임을 분명히 했다. 연립여당인 공명당도 고이즈미 정권을 계속 지원할 것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자민당 내 반대세력은 ‘책임론’을 제기하며 총리 퇴진을 압박할 태세다. 이번 선거에서 의석을 크게 늘린 민주당도 “자민당의 실정(失政)을 국회에서 철저히 따지겠다”고 벼르고 있다.
일본 언론들은 “고이즈미 총리가 당장 실각하지 않더라도 정권 기반이 약화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평가했다. 고이즈미 총리가 의욕적으로 추진해 온 북한과의 국교정상화 협상도 ‘숨고르기’에 들어갈 것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자만이 부른 패배=자민당은 이번 선거 전 국민연금법 강행 처리와 자위대의 이라크 다국적군 파병 등으로 초반부터 고전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는 자민당 지지도가 고이즈미 정권 출범 후 최저 수준인 30%대로 떨어졌다. 국민 부담을 늘리는 국민연금법을 밀어 붙인 데다 자위대의 이라크 다국적군 참가를 이렇다할 심의도 없이 졸속 결정한 데 대한 여론의 반발 때문이다.
다급해진 여당이 선거 이틀 전으로 납북 피해자 소가 히토미 가족의 재회를 앞당기고 고속도로 통행료 인하 방침을 밝히는 등 ‘표심’을 돌리려 애썼지만 역부족이었다. “이번 선거가 끝나면 앞으로 3년간 표로 심판할 기회가 없다”는 야당의 호소에 자민당의 전통적 지지층인 노인과 농촌 주민 중 상당수가 여당에 등을 돌렸다. 일본 언론은 “집권 기간이 길어지면서 자신감이 자만으로 바뀐 탓”이라고 꼬집었다.
▽정권 유지해도 약체화 불가피=잠정집계 결과 자민당이 획득한 의석이 선거 승패의 기준으로 정한 51석엔 못 미쳤지만 비교체 대상 의석과 연립여당인 공명당 의석을 합하면 여전히 과반수를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고이즈미 총리의 당 장악력이 약해지면서 ‘포스트 고이즈미’를 겨냥한 당 내 차기주자들의 각축이 표면화될 전망이다. 자민당 실력자인 아오키 미키오(靑木幹雄) 참의원 간사장은 “참의원 선거에서 패배하면 총리는 ‘죽은 몸’이 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번 선거를 통해 자민당 총재 임기인 2006년 9월까지 ‘롱런’을 보장받으려던 고이즈미 총리의 계획은 차질을 빚을 수밖에 없다.
반면 민주당 오카다 가쓰야(岡田克也) 대표는 전 대표의 국민연금 미납 스캔들로 얼룩진 당의 이미지를 쇄신하고 당세 확장에 기여해 차기 총리 경쟁에 유리한 고지를 확보했다.
한편 공산당과 사민당 등 진보계열 정당들은 명맥을 유지하는 데 그쳐 양당체제가 일본 정계에 더욱 확실하게 뿌리내리는 계기가 된 것으로 평가된다.
도쿄=박원재특파원 parkw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