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군 韓信(1)
한왕(漢王) 유방이 처음 한중(漢中)으로 들 때만 해도 아직 봄기운이 남아 있었는데 어느새 계절은 가을로 접어들고 있었다. 남정(南鄭)에 임시로 마련한 한왕의 왕궁은 한낮의 늦더위 속에 고요했다. 말이 왕궁이지 옛날 부호의 집을 빌려 급한 곳만 손본 것이라 대청을 대전(大殿)으로 쓰자니 궁색하기 짝이 없었다.
“참으로 고요하구나. 관(관)아. 그러나 나는 이 고요함이 싫다.”
그날따라 유난히 어두운 얼굴로 평상에 걸터앉아 있던 한왕이 문득 그림자처럼 곁에 붙어서 있는 노관을 쳐다보며 물었다. 직위를 붙이지 않고 어릴 적에 부르던 이름 그대로 노관을 부르는 것으로 미루어 무언가 사사롭게 풀고 싶은 마음속의 응어리가 있는 듯했다. 노관이 말없이 한왕을 마주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젯밤에는 장졸 합쳐 몇 명이나 달아났다고 하더냐?”
한참 뒤에 한왕이 그렇게 물었다. 유들유들하고 뱃심 좋은 그답지 않게 어둡고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그제야 노관도 한왕이 무엇 때문에 울적해 하는지 알만 했다. 늘 그래왔듯 아는 대로 간결하게 대답했다.
“위랑(衛郎)과 칠대부(七大夫)가 각기 한 사람씩에 사졸이 대략 쉰 명 남짓입니다.”
“그런가? 그럴 테지. 실은 나도 이곳이 지겹다.”
한왕이 다시 어린아이 시절로 돌아간 듯 솔직하게 말했다. 같은 마을에서 한날한시에 태어나 그 뒤 오십년 가까운 세월 붙어살다시피 한 노관도 그런 한왕의 심사를 알듯했다.
한중에 들어온 지 한 달이 지나면서 마지못해 따라온 원래부터의 한나라 장졸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한왕을 흠모해 제 발로 따라나선 다른 제후의 군사들까지도 마음이 변해갔다. 저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를 부르며 밤마다 잠 못 이룰 만큼 간절하게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러다가 석 달이 다 돼 가는 그 무렵은 장졸을 가리지 않고 다섯명씩 열명씩 무리를 지어 군중(軍中)을 빠져나가 동쪽으로 달아났다.
“허나 대왕께서 그렇게 말씀하셔서는 아니 됩니다. 소(蕭)승상이 말한 대로, 대왕께서는 오히려 이 파촉 한중 땅에서 힘을 길러 흙먼지를 말아 일으키는 기세로 되돌아가야(捲土重來) 합니다. 반드시 오늘의 이 구차함과 욕스러움을 씻고 당당히 동쪽으로 나아가셔야 백제(白帝)의 아들을 베어죽이고 새 세상을 열 적제(赤帝)의 아드님일 수 있습니다.”
노관이 한왕의 울적한 심사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애쓰며 그렇게 말을 받았다.
그때 갑자기 어수선한 발자국 소리와 함께 누가 급하게 대전으로 들어왔다. 한왕과 노관이 아울러 살펴보니 갑주를 삼엄하게 두르고 칼을 찬 번쾌였다.
“번(樊)낭중이 무슨 일로 이리 급하게 달려 오셨소?”
노관이 한왕을 대신해 그렇게 물었다. 그 무렵 번쾌는 낭중(郎中)으로 벼슬이 올라 있었다. 번쾌가 숨결조차 제대로 가다듬지 못하고 일러바치듯 한왕을 보고 말했다.
“대왕. 기막힌 일이 터졌습니다. 오늘 아침 소하가 달아났다고 합니다.”
“승상 소하가? 아니 그게 무슨 소린가?”
한왕이 알 수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번쾌가 멀리서도 들릴 만큼 숨을 씨근거리며 대답했다.
글 이문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