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로 시비를 가리다가 격해지면 싸움이 벌어진다. 입씨름이 주먹다짐이 되는 것이다. 일단 그렇게 되면 승패는 가려져도 시비는 가려지지 않는다. 세상만사 인간이 하는 수작에 절대로 옳기만 한 것도, 절대로 그르기만 한 것도 없다. 그런데도 싸움이 시작되면 한쪽은 옳고 다른 쪽은 그르다고 내세운다. 내 편은 선, 적대하는 편은 악, 그래야 싸움이 된다. 개인이나 집단이나.
주먹다짐을 하면서 또는 전쟁을 하면서, 실은 내 쪽에도 좀 잘못은 있고 저쪽에도 일리가 있다고 해서는 싸움이 안 된다. 싸울 때엔 우선 정의를 독점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전쟁이 나면 제일 먼저 희생되는 것은 진실’이다. 진실을 밝히려면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다퉈선 안 된다. 톤을 낮추고 차분히 까다로운 사실관계와 이해득실을 따져봐야 한다.
▼‘하나의 정답’이 지배하는 사회▼
옳은 것을, 진리를 독점하려는 것이 반드시 험악한 싸움판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걸 누구보다도 대한민국의 국민은 잘 알고 있다. 해마다 연례행사로 치르는 대학입시 문제에 만일 옳은 답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라면 온 나라가 흔들린다. 정답은 하나요, 하나라야만 한다. 하나의 정답, 하나의 진리, 하나의 정의만을 찾는 교육, 사회, 문화가 이렇게 해서 이 땅에 뿌리를 내렸다.
사람을 가르치는 데에는 학교 못지않게 언론매체, 특히 방송의 역할이 크다.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지상파 방송은 하나의 정답을 찾는 퀴즈 프로를 매주 다투어 방영하고 있다. 거기에 ‘출전’해 끝까지 살아남으면 유럽 여행 등 웬만한 학부모는 꿈도 꿀 수 없는 푸짐한 상여가 주어진다. 퀴즈 왕의 탄생은 가문의 영광이자 그를 배출한 학교의 영광이다. 그러기에 그를 응원하러 교장 이하 교사, 학생이 떼를 지어 와 ‘응원’한다. 기이한 풍경이다. 그건 맹목적인 ‘지식 암기’의 경연장일 뿐 물어보고 의심해보고 생각을 돌려보곤 하는 사고력, 창의력이 깃들 틈이란 거기에 없다. 그렇게 훈련된 우리나라 학생들이 대학에만 들어가면 학력이 급격히 저하된다는 것은 이러한 교육 체제 속에 사전 프로그래밍된 당연한 결과다.
하나의 정답 앞에 다른 해답은 죽어야 된다. 하나의 진리 앞에 다른 이치는 오류일 수밖에 없다. 추상적인 수학의 세계엔 하나의 정답, 하나의 진리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인문 사회과학의 세계엔 그런 것이 없고,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하물며 정치의 세계에는, ‘위대한 수령의 유일사상’을 태양처럼 받들어 모시는 1인 독재체제를 제외하곤, 적어도 민주국가에는 진리를 독점하는 정당도 지도자도 없다. 전쟁의 극한 상황이 아니라 평화로운 일상 상황에서는.
전쟁이 서로를 죽이는 상극의 세계라면 평화의 세계는 서로가 사는 상생의 세계다. 의견이 다르고 이해가 엇갈린 사람끼리 그런대로 상대방에도 일리가 있고 이쪽에도 재고할 점이 있다고 고쳐 생각하면서 대화를 이어가는 게 상생의 논리다. 싸움은 한쪽이 죽거나 서로가 죽어야 하는, 그야말로 ‘최후의 수단(ultima ratio)’이다.
행정수도를 옮기자는 쪽에도 일리는 있다. 그를 반대하는 쪽에도 일리는 있다. 국가의 안보, 국토의 균형발전, 경제의 국제경쟁력 향상 등 다양한 정책목표의 추구에서 어느 쪽이 더 옳은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건 이제부터 심도 있게 따져봐야 할 문제다. 아무도 결과를 장담할 수 없다. 수도를 옮긴 한국을 살아본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아직은 더 알아보고 더 따져봐야 할 일이 많기만 하다.
▼반대의견 존중해야 ‘상생의 정치’▼
게다가 지금은 서로가 서로를 죽이려는 상극의 싸움판이 아니라 서로 살자는 상생의 정치를 하겠다는 판이다. 그런데도 정의를 독점한 양 반대 이견을 압살하려 하거나, 정답을 맞힌 듯이 다른 말 하는 입을 틀어막으려 한다면 그건 상생의 정치가 아니다. 그건 도대체 정치도 아니요, 민주주의도 아니다. 정치란 하나의 정답, 하나의 정의가 지배하는 싸움판도 아니요, 퀴즈판도 아니다.
최정호 객원 大記者·울산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