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인점에 ‘에누리 행사’라고 쓴 안내문이 있던데 공공장소에서 일본어를 써도 되는 겁니까?”
“죄송합니다만 에누리는 일본어가 아니라 순 우리말입니다.”
“아니 그러면 고유어라는 걸 자꾸 홍보해서 사람들이 쓰게 해야죠. 제 주변 사람은 다 그 말을 일본어로 알고 있어요.”
국어사전과 관련된 일을 하면서 알게 된 것은 우리말을 사랑하고, 전문가 못지않은 지식까지 갖춘 사람이 많다는 사실이다. 이런 분들의 의견은 사전을 만드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된다. 하지만 잘못된 정보에 근거한 의견이나 항의를 대하는 경우도 많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다 우리말에 대한 사랑이 넘쳐서 그런 것을….
국어사전을 만드는 일은 시간과 일손이 많이 드는 작업이다. 사전에 실을 단어를 고르는 일부터가 쉽지 않다. 요즘 유행하는 ‘웰빙(well being)’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쓰고 있는 어떤 국어사전에도 올라 있지 않다. 앞으로도 이 말이 국어사전에 오를지는 알 수 없다. 외국어를 그대로 썼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유행어는 잠시 쓰이다 사라질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이처럼 특정 시기에만 쓰이다 사라지는 말은 진정한 우리말 단어가 되었다고 볼 수 없어 사전에 싣지 않는다. 새로운 단어가 사전에 정식으로 오르기까지는 방대한 자료를 시간을 두고 여러 각도에서 검토하는 작업이 따르게 마련이다.
단어의 풀이를 하는 작업도 마찬가지다. ‘독대’라는 말은 원래 예전에 벼슬아치가 혼자 임금을 만나던 일을 뜻했으나 지금은 대통령이나 최고 경영자(CEO) 등을 만날 때도 쓰인다. 단어마다 이런 의미까지 풀이에 넣어 주려면 당연히 실제로 그렇게 쓰이고 있는지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사전을 만들기 위해 몇 년씩 걸려 자료를 모아야 하는 이유다.
국어사전을 만드는 데 함께 일할 사람을 찾는다는 말을 듣고 덥석 시작한 일이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처음에는 우리말의 단어를 섬세하게 풀이하는 일이 그저 매력적으로만 여겨졌다. 하지만 전반적인 사전의 수정, 보완 작업을 맡게 된 지금은 재미보다는 고민이 더 많다. 개별 단어 풀이에 그치지 않고 전체 체계 속에서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다 아는 우리말 단어 모아서 사전 만드는 데 무슨 시간이 그렇게 오래 걸리느냐는 힐난을 들을 때는 안타까움을 느낀다.
사람마다 단어에 대한 느낌과 활용 방법이 다르다는 점은 사전 만드는 작업을 더욱 어렵게 한다. 실생활에서 발견되는 단어의 여러 모습에서 공통분모를 추려 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한 단어의 풀이를 놓고 사전 편찬자끼리 얼굴을 붉히며 격론을 벌이는 일도 자주 있다. 하지만 단어들의 미묘한 쓰임을 정확하게 풀이해 내고 딱 맞는 적절한 용례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국어사전을 위해 거의 한평생을 바치신 분들을 생각하면 10년이라는 세월은 그야말로 명함도 못 내밀 시간이다. 하지만 20대 후반과 30대의 대부분을 바친 일이기에 오늘도 사전 속 수많은 글자들과 씨름하며 더위를 잊는다. 국어사전이야말로 우리말을 가장 정돈된 형태로 보존할 수 있는 ‘문화유산’이라는 믿음을 되새기면서….
이운영 국립국어연구원 학예연구사
약력: 1969년생. 서울대 언어학과를 나와 같은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5년부터 국립국어연구원에서 국어사전 편찬 업무를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