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 브에나비스타인터내셔널코리아
《23일 개봉 예정인 ‘킹 아더’는 영국 최초의 통일왕국을 세운, 그 이름도 빛나는 아더 왕의 본명이 ‘루시우스 아토리우스 카스투스’였다는 낯선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 영화는 ‘엑스칼리버’ ‘카멜롯의 전설’ 등 아더 왕을 다룬 여느 영화와 달리 신화와 전설의 외피를 벗어던진 채 어둡고 습기 찬 역사적 진실의 시각에서 아더와 주변인물을 응시한다.》
‘킹 아더’의 초점은 아더가 엑스칼리버를 뽑아들며 한껏 폼을 잡는 순간에 있지 않다.
이 영화는 아더가 로마와 브리튼의 혼혈이며, 원탁의 기사들은 로마를 위해 의무복무를 하는 변방의 사마시아 종족 전사들이며, 기네비어는 온몸에 문신을 새기는 토착민 워드족 출신의 여전사라는 점 등 새로운 해석과 설정이 주는 충격과 파장을 비교우위로 삼으려 한다.
하지만 제목만으로도 ‘빅 사이즈’임을 기대하게 하는 이 영화가 결정적으로 잊은 게 있다. 관객이 이 영화를 찾는 이유는 숨겨진 역사를 후벼 파는 지적 열망 때문이 아니라, 단지 즐거움과 재미를 얻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말이다. ‘킹 아더’는 산수도 못 하면서 응용수학을 하겠다고 벼르는 학생을 연상시킨다. 자고로 블록버스터임을 자임하려면 차라리 떠들썩하거나 사치스럽기라도 해야 했다.
로마가 브리튼에 파견한 사령관 아더(클라이브 오웬)와 의무복무를 마치고 귀향을 눈앞에 둔 원탁의 기사들에게 마지막 임무가 주어진다. 북방의 색슨족과 원주민인 워드족에 의해 고립된 로마교황의 후계자 알렉토를 구출하는 것. 천신만고 끝에 아더 일행은 알렉토를 데리고 돌아오지만, 색슨족이 대군을 이끌고 침략을 감행한다. 랜슬럿 등 원탁의 기사들은 자유의 몸이 돼 귀향할 것인지 아니면 아더와 생사를 함께할 것인지를 두고 고민한다.
‘글래디에이터’의 절실함, ‘반지의 제왕’의 스케일, ‘트로이’의 디테일에 길들여진 현대 관객의 입맛을 자극하기엔 ‘킹 아더’의 액션은 상상력이 부족하다. 이 영화는 도입부에 ‘맛보기’로 등장하는 전투장면 이후 관객이 무려 1시간 넘게 다음 전투장면을 기다리는 동안 전쟁서사극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긴장감과 리듬감이 실종돼 버린다. 심각하게 칼을 휘두르지만 쓰러지는 상대는 이상하리만큼 처절해 보이지 않는(거의 피도 튀지 않는다) 전투장면은 화려하고 낭만적인 쪽도, 잔혹하고 사실적인 쪽도 아니다.
캐릭터의 부피감을 갖지 못하고 평면적 시나리오에 따라 분주하게 움직이는 아더와 원탁의 기사들은 인간적 고뇌는커녕 연기의 고뇌조차 보여주지 못한다. 가장 튀는 캐릭터인 기네비어(키라 나이틀리)도 요조숙녀와 ‘라라 크로포드’(‘툼 레이더’의 여전사) 사이를 왔다 갔다 하지만, 그녀가 매순간 ‘왜 그런 행동을 하는지’ 설명하는 맥락이 부족하다. 아더왕(“랜슬럿! 자네가 도와줘야 우린 해낼 수 있어”)이나 기네비어(“내일의 운명은 내일에 맡겨요”)나 침략자 색슨족의 잔혹한 두목 세드릭(“드디어 대적할 만한 상대를 만났군”)이 스스로 멋지다고 생각하며 던지는 대사들은 울림이 없어 자기 캐릭터를 외려 얼어붙게 만든다.
‘킹 아더’의 음악과 장면이 불화를 겪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한스 짐머의 음악은 한껏 고조돼 관객의 감정선을 뒤흔들고자 하지만, 정작 화면은 역동성을 상실한 채 설렁설렁 흘러가버려 심드렁해질 수밖에 없다.
‘리플레이스먼트 킬러’ ‘트레이닝 데이’를 연출한 안톤 후쿠아 감독 작품. 15세 이상 관람 가.
이승재기자 sjd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