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로버트 로플린 스탠퍼드대 교수가 한국과학기술원(KAIST) 신임 총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노벨상 수상자답게 취임식에서 “KAIST를 세계 최고의 연구 중심 대학으로 만들겠다. 큰 꿈을 가져야 하고 그것을 현실로 만드는 것이 본인이 할 일이다”고 밝혔다. 국내 대학 총장으로 영입된 첫 외국인의 포부였다.
KAIST는 어떤 학교인가. 고 박정희 대통령이 심혈을 기울여 키워 낸 과학기술입국의 상징물이다. 글로벌 수준의 연구 성과들을 내고 있고, 졸업생들은 응용력과 근성이 뛰어나 산업현장에서 가장 크게 환영 받고 있다. 열정적인 학풍은 한때 TV드라마로 제작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자타가 공인하는 톱이다. 하지만 KAIST는 수년 전부터 위기감을 느껴 왔다. 병역특례라는 독점적 우위가 사라졌고 포항공대 등 막강한 경쟁자들이 등장했다. 기업들의 요구도 한층 까다로워졌다. 그래서 이번에 강호의 최고수를 초빙했다. 안방 대장에 안주하지 않고 초일류에 도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국내 기업들이 세계시장에서 선전하고 있는 반면에 교육부문은 경쟁력이 대단히 취약하다. 해외 박사만이 인정을 받고, 조기유학과 해외연수가 붐을 이룬다. 지방대는 학생들이 수도권으로, 외국으로 떠나면서 벼랑 끝에 내몰렸다. 수월성을 추구해 개혁을 해야 하는데도 교육정책은 하향평준화를 지향하고 있다. 대학이 변화에 둔감하고 개혁을 거부해서는 우리에게 미래가 없다. 답답한 교육 현실을 감안할 때 KAIST는 정말 용기 있는 선택을 했다. 외부 충격이 주어졌기 때문에 교육계 내부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 것이다.
요즘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의 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그만큼 역할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어떤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서 고심할 필요가 없다. 적합한 사람을 뽑아서 일을 맡기면 알아서 한다. “왕이 길을 잃고 방황하면 국민이 그 대가를 치른다”는 영국 속담이 있다. 유능한 총장을 선출하고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 대학 개혁의 요체다. 우리 학생들은 외국 유학을 가서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다. 해외에서 탁월한 업적을 내는 한국인 학자들도 많이 있다. 공부하고 연구하는 여건을 조성해 주지 못해 국내 대학들이 위기에 처했다는 얘기다. 그래서 유능한 대학 CEO의 등장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유능한 인재를 발탁하면서 국적을 가리지 않는 것이 세계 추세다. 신임 KAIST 총장은 개인 역량이 뛰어날 뿐 아니라 외국인이라는 이점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도 정부의 간섭, 교육계의 견제로부터 자유롭다. 거스 히딩크 감독이 한국인이었더라면 소신을 갖고 밀어붙이지 못했을 것이다. 변화와 개혁을 위해서는 때로는 사대주의도 필요하다. 국내 최고의 대학과 유능한 외국인 총장이 만났으니 성공을 기대해도 좋을 것이다. 설령 실험이 실패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시도를 하는 가운데 변화가 일어나고 시행착오를 통해 지식이 축적된다. 외국인 총장의 등장에 자극받아 앞으로 성공하는 토종 총장들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이언오 삼성경제연구소 전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