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보∼ 사랑해요…^^.”
“사랑? 그거 나한테 보여줄 수 있어? 웬 쓸데없는 소릴….”
이런 부부가 있다면 당연히 이혼감이다. 역시 보여줄 수 없는 ‘양심’ 때문에 군에 못가겠다는 사람들로 세상이 시끄럽다. 지금까지 ‘양심’ 운운하면 당연히 ‘쓸데없는 소리’ 취급을 받았다. 지금까지 ‘양심적 병역거부자’ 1만여명이 감옥으로 갔고 지금도 매년 700여명이 군대 대신 감옥으로 간단다. 민주화운동을 했던 ‘양심범’들도 마찬가지였다.
▼병역거부 年700명 전과자돼▼
대법원이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유죄판결을 내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역사발전은 새벽에 동이 트듯이 조용히 다가온다. 비록 유죄라는 결론에서 달라진 것은 없지만 그 내용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 재판에 참여한 12명의 대법관 중 양심을 우선시한 이강국 대법관의 소수의견 말고도 유지담 대법관을 비롯한 5명이 대체복무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보충의견을 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입법자의 몫으로 돌렸다. 말하자면 12명의 반수인 6명이 자신의 신념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젊은이들을 기계적으로 감옥에 보내는 것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사랑’과 마찬가지로 ‘양심’도 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일정한 심리상태를 뜻한다. 철저하게 주관적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주관적이니 사람마다 다르고 고정되지 않고 변화될 수 있다는 특징 또한 같다. 이런 이유 때문에 ‘너희가 사랑을 믿느냐’는 식으로 양심에 대한 불신도 싹텄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사랑이나 양심은 개인적 주관적이고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그 실체나 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우리 헌법이 “모든 국민은 양심의 자유를 가진다”고 선언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양심을 우리 내면에 있는 신의 음성으로 비유한 시인도 있었다. 이 세상에는 보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보이지 않는 가치들도 얼마든지 있다.
양심의 자유가 신성한 국방의무보다 우선할 수 없다는 견해도 존중되어야 한다. 현행법을 토대로 해석론으로 판결해야 하는 대법원의 입장에서 보면, 구체적 의무를 마다하고 추상적 권리를 우선시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법학의 해묵은 논쟁, 법적 안정성과 실질적 정의 사이의 충돌을 보는 느낌이다.
그렇더라도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들을 해마다 700명씩 전과자로 찍어내는 이 무모한 ‘기(氣)싸움’을 국가가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다수가 다수를 위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가 얼마나 소수자를 배려하느냐에 그 질적 평가가 달려 있다. 국방의무는 누구나 준수해야 할 신성한 의무다. 그러나 이 의무가 다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일정한 ‘예외’를 인정하는 국가적 관용 또한 포기해서는 안 된다.
입법적으로 검토될 수 있는 대체복무는 그 기간이 현역 군 복무보다 길어야 한다. 양심과 비양심을 구별하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양심을 지키기 위해 충분히 큰 대가를 지불하도록 하면 될 일이다. 양심도 지키면서 군에 가지 않는 현실적 이익도 챙기겠다면 그것이야말로 비양심으로, 공감을 살 수 없는 일이다.
▼현역군인보다 복무기간 길게▼
우리는 소수자들의 ‘양심’에 대해 부채를 지고 있다. ‘정치적 양심범’들이 없었다면 오늘의 민주화는 불가능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 ‘양심’들은 당대의 실정법과 맞서 싸우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대부분 긴 고통 끝에 평가를 받는 과정을 밟아 왔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안중근 의사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테러리스트’로 일본의 재판을 받지 않았던가.
법은 원칙이 생명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예외를 고민하지 않는 법은 맹목(盲目)일 뿐이다.
배종대 고려대 교수·헌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