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盧武鉉)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22일 오전 제주 서귀포시 신라호텔 인근의 해안 산책로를 따라 1시간 가량 산책을 하며 사전에 정한 주제 없이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눴다.
반소매 티셔츠 차림의 간편한 복장을 한 두 정상은 불볕 더위 탓에 태극부채를 들고 연신 부채질을 했다. 산책 도중 고이즈미 총리는 내리막길에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 했으며, 한동안 절뚝거리며 걸었다.
두 정상은 영화 '쉬리'의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쉬리 벤치'에 앉아 이 영화를 화제에 올렸다.
노 대통령이 "영화는 봤는데, 이 벤치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하자, 고이즈미 총리도 "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영화를 보면서 남북간의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두 정상은 "날씨가 더워지면 에어컨이 많이 팔리는 등 내수 경기에 영향을 미친다"는 등 경제와 관련된 가벼운 얘기를 나누기도 했다.
산책로에서 돌아오는 도중에 한국으로 가족과 휴가를 온 일본 어린이가 고이즈미 총리에게 인사를 했고, 이를 계기로 노 대통령은 "저 또래 (귀국)아이들과 우리나라 아이들이 같은 역사를 다르게 배우고 있다"면서 과거사 문제를 푸는데 있어 고이즈미 총리의 결단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편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이 과거사 문제를 거론하지 않겠다고 한 것을 두고 "이번 한일 정상회담은 굴욕외교"라고 비판하고 나섰다.
김영선(金映宣) 최고위원은 상임운영위원회의에서 "신사참배와 같은 도발을 하는 것이 일본인데, 국가원수로서 제 입에 자물쇠를 채우는 발언은 옳지 않다"며 "국내에 대해서는 오기정치를 하면서 외국에는 굴욕외교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원희룡(元喜龍) 최고위원은 전날 공동회견에서 노 대통령이 일본 기자의 질문을 그대로 받아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표현한 것을 가리켜 "쉬리의 언덕에서 왠 다케시마냐"라고 비판했다. 김형오(金炯旿) 사무총장도 "정부가 친일진상규명법은 확대하면서 막상 일본의 과거 침략행위에 대해선 입을 닫는 이중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가세했다.
서귀포=김정훈기자 jnghn@donga.com
박민혁기자 mhp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