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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석민기자의 酒변잡기]칵테일의 추억

입력 | 2004-07-22 16:25:00


그가 처음 칵테일을 접한 건 대학 신입생 때였다. 서울 대학로 마로니에공원 근처의 한 카페에서 한 여성을 앞에 두고 앉았다. 때는 더위가 막 시작된 초여름 오후. 그는 메뉴판을 한참 들여다본 후 스크루드라이버라는 칵테일을 주문했다.

하필 왜 칵테일이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만난 지 얼마 안 돼 폼을 잡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고 주머니 사정 때문에 한 잔으로 오래 버틸 수 있는 것을 선택했을 수도 있다.

몇 시간 후 카페를 나왔을 때 그는 어지럼증을 느꼈다. 초여름 햇살이 너무 눈부셨기 때문이었는지, 술이 생각보다 독했기 때문이었는지, 공 들인 오랜 대화 후 그녀의 마지막 말이 “나는 여자보다 남자 친구가 더 많다”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는지는 불분명했다. 아무튼 둘은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

그날 이후 십수년이 지나도록 그는 되도록 칵테일을 입에 대지 않았다. 무언가 목적을 가지고,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마셔본 적도 없는 술을 선택했던 그 기억이 부끄러웠고 또 싫었다. ‘차라리 편하게 소주를 마셨더라면’ 하고 후회했다.

‘시마과장’의 저자인 일본 만화가 히로카네 겐시(弘兼憲史)는 술에 대해서도 상당한 전문가다. 히로카네씨는 칵테일에 관해 쓴 책의 서문에서 “‘여자를 유혹해서 취하게 하려면 스크루드라이버가 좋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칵테일 하면 여자에게 구애할 때 마시는 술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른다”고 썼다.

얼마 전 이 구절을 처음 읽은 그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다. 뭘 모르던 시절이기는 했지만 술만은 제대로 골랐던 것이다.

보드카에 오렌지주스를 섞는 스크루드라이버도 마티니나 맨해튼처럼 어느 바에서나 주문할 수 있는 스탠더드 칵테일이다. 유전에서 일하던 한 미국인이 오렌지 주스에 약간의 보드카를 넣은 후 스크루드라이버(나사돌리개)로 저어 마셨다고 해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스크루드라이버가 ‘원조 레이디 킬러’였다니, 그녀에게 마시도록 했어야 했나. 모처럼 아주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내며 그는 냉장고에서 보드카를 꺼내 잔에 따르고 오렌지 주스를 부었다. 그리고 스크루드라이버를 찾기 위해 공구함을 뒤지기 시작했다.

홍석민기자 sm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