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적인 문제에 대한 토론은 절대로 제한되면 안 된다. 이러한 토론은 활기 있게 진행돼야 하고, 활짝 열려 있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정부나 공직자들에 대한 격정적이고 통렬하며, 때로는 불쾌할 정도로 날카로운 공격이 포함될 수도 있다.” 우리나라 얘기가 아니다. 1964년 미국 연방대법원 브레넌 판사의 판결문에 포함된 구절이다.
40년 전 미국 대법원은 ‘뉴욕 타임스 대(對) 설리번 사건’을 다뤘다. 설리번은 당시 앨라배마주 몽고메리시의 경찰국장이었다.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주도하는 인권운동이 열기를 얻어가던 이 시기에 미국 각지의 인권지도자들은 위증죄로 기소된 킹 목사의 변론기금을 모으기 위해 뉴욕 타임스에 의견 광고를 게재한다. 이날이 1960년 3월 29일이다. 몽고메리시 지역신문이 이 광고와 관련된 기사를 게재한 것은 4월 5일이다. 그 기사를 통해 광고 전문을 검토한 설리번 국장은 자신의 명예가 심각하게 손상됐다며 뉴욕 타임스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다. 광고내용 가운데 경찰이 앨라배마주립대 학생들을 강압적으로 다뤘다는 부분은 사실이 아니며, 결과적으로 경찰 책임자인 그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것이다. 앨라배마 주법원은 이 소송에 대해 뉴욕 타임스의 유죄를 인정한다. 주 대법원은 뉴욕 타임스가 설리번 국장에게 50만달러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그러나 뉴욕 타임스의 항소로 이 사건을 심리하게 된 연방대법원은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지탱하는 수정헌법 1조의 관점에서 볼 때 앨라배마 주법원의 판결은 미국의 헌법정신을 위반한 잘못된 결정이라고 판결한다. 이 판결로 일반화한 원칙이 ‘현실적 악의’라는 개념이다. 이는 공직자가 공무와 관련된 일에 대해 명예훼손에 대한 배상을 구하려면 언론사가 보도한 내용이 허위임을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보도했거나 또는 그 진위를 무모할 정도로 무시하면서 보도했음을 공직자 자신이 입증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이 판결 이후 미국에서는 공직자가 언론을 상대로 소송을 해 이긴 경우가 거의 없다. 현실적 악의 원칙이 적용되면 도저히 이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미국의 헌법학자들은 뉴욕 타임스 대 설리번 판례는 특히 정부의 일과 관련한 보도들에 대해 수정헌법 1조의 적용범위를 최대한 확장해 언론의 자유를 반석 위에 올리는 획기적인 계기였다고 평가한다. 이 판결이 없었으면 펜타곤 페이퍼의 공개나 워터게이트 사건의 추적 등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이 판결문은 심지어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려면 어느 한도까지는 사실 관계가 잘못되는 것까지도 허용돼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소한 오류 때문에 자유가 박탈될 수 있다는 것이다. 브레넌 판사는 이것을 ‘숨쉴 공간’이라고 불렀다. 이 판결에 함께 참여했던 골드버그 판사는 동조 의견에서 “미국시민과 언론은 비록 과도함과 악용에서 오는 해가 있다 하더라도 연방헌법으로부터 공직자의 행동을 비판할 수 있는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특권을 부여받고 있다”고 썼다.
눈을 돌려 한국의 현실을 보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어디쯤 있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5월 언론중재위원회 집계를 보면, 전체 신청건수 40건 가운데 절반인 20건이 정부 관계자들이 제출한 중재신청이다. 2002년까지 7%대에 머물던 정부 관련기관의 중재신청 건수는 현 정부 들어 30%대로 급증했다. 중재가 아니라 법정으로 직접 가는 공직자들의 수도 민주화와 함께 지속적으로 늘어 검사들과 청와대 비서관, 심지어 대통령까지도 언론사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하는 민주화의 역설을 드러내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이러한 행동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언론은 정부의 일을 가능하면 토론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것이다. 한국의 민주주의 실험은 전 세계가 지켜보는 가운데 역동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민주주의는 목적을 위해 절차를 왜곡하지 않는다. 그래서 시끄럽고 때로는 비효율적이다. 한국은 미국 수준의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는 아니다. 그렇다고 70년대 한국식 민주주의로 돌아갈 수는 없다.
이재경 객원 논설위원·이화여대 교수·언론학 jklee@ewha.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