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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세상]박경미/동양수학史 다시보기

입력 | 2004-07-23 18:48:00


필자의 편견인지 모르지만 샹송을 들으면 프랑스어는 발음마저 예술적인 우아한 언어라는 생각이 든다. 절도 있는 영국식 영어를 들으면 귀족적인 분위기와 더불어 대영제국의 영화가 느껴진다. 연음이 많아 굴러가는 듯한 발음의 미국식 영어에는 왠지 풍요로운 자본주의의 냄새가 배어있는 것 같다. 이러한 정서가 혹시 서양의 것이라면 일단 머리를 조아리고 보는, 사고의 식민성에서 나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학교교육을 받으면서 궁금했던 것은 동양에도 수학자가 있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수학책에 나오는 무슨 정리니 법칙이니 하는 것에는 예외 없이 서양 사람의 이름이 붙어 있어, 수학은 서구 중심으로 발전해 왔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나 수학사를 면밀히 검토하면서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음을 알게 됐다. ‘피타고라스의 정리’는 서양보다 500년이나 앞서 저술된 중국의 수학책 ‘주비산경’에 ‘구고현(九皐懸)의 정리’로 실려 있다. 이 책은 피타고라스의 정리에 대한 가장 간결하고 세련된 증명이라고 평가되는 증명을 한 장의 그림으로 제시하고 있다. 또한 17세기 프랑스의 파스칼이 고안한 ‘파스칼의 삼각형’도 이보다 300년 앞서 저술된 ‘사원옥감’에 실려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십진법과 달리 컴퓨터는 0과 1, 두 개의 수로 이뤄진 이진법을 쓴다. 서양에서 이진법을 처음 발견한 독일의 라이프니츠는 ‘주역’을 구성하는 64개의 괘(卦)가 이진법과 관련된다는 사실을 접하고는 동양 수학을 극찬했다고 한다. 아라비아 숫자는 인도와 아라비아에서 만들어졌으며, 0과 음수를 본격적인 수로 인정한 시기도 동양이 훨씬 앞선다. 이처럼 수학 발전의 토대가 되는 기본 개념들은 동양에서 정립된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에도 수학책 ‘구일집’을 지은 홍정하, ‘구수략’의 저자인 최석정, 남병길 같은 수학자들이 있었다. 하지만 중국과 마찬가지로 우리 수학은 수학적 발견을 이론화하는 작업에 소홀했다는 한계가 있다. 최석정은 가로 세로 대각선으로 합이 같아지도록 수를 배열하는 다양한 마방진(魔方陣)을 만들었지만, 이를 만드는 일반적인 방법이나 성질을 탐구하기보다는 신비로운 마방진을 얻은 것에 만족했다.

동양에서는 수학을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실용적인 분야로 여겨 일반화하고 법칙화해 학문으로 발전시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에 반해 서양에서는 피타고라스, 라이프니츠, 파스칼처럼 철학자와 수학자를 겸한 경우가 많고 수학을 추상적인 사유의 결정체로 여겼기 때문에 수학은 일찍이 체계적인 학문으로 정립됐다.

고대 동양 수학을 집대성한 중국의 ‘구장산술(九章算術)’과 고대 서양 수학의 정수를 담은 그리스 로마시대의 ‘원론(Elements)’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확연히 알 수 있다. 9개 장으로 구성된 ‘구장산술’은 실제 생활에서 발생하는 문제와 그 풀이법을 제시한다. 방전(方田)장에는 전답의 넓이와 관련된 문제가, 속미(粟米)장에는 곡물 교역의 문제가 수록돼 있다. 이에 반해 ‘원론’은 공리, 정의로부터 시작해 연역적인 방법에 의해 일련의 정리들을 체계적으로 증명해간다.

수학은 동양과 서양이 함께 견인하며 발전시켜 왔다. 서양 중심의 시각에서 탈피해 동양의 것을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여러 분야에서 일고 있듯이 수학에서도 관점을 뒤집는 ‘수학사 다시보기’가 필요하다.

박경미 홍익대교수·수학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