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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규모 脫北]빨라진 한국行…정착은 먼길

입력 | 2004-07-27 18:44:00


《탈북에서 서울 도착까지의 기간도 급속히 단축되고 있다. 북한을 떠난 지 불과 8일 만에 한국에 입국한 사례가 올해 등장했으며 탈북 한 달 만에 입국한 경우도 최근 6건이나 된다. 대량 탈북과 속도가 상승작용을 하며 탈북러시를 가속하는 양상이다. 그러나 5000명을 넘어선 탈북자들의 한국사회 정착은 수시로 멈춰서는 ‘완행열차’ 수준이다. 탈북자들의 적응에도 문제가 있지만, 이들을 ‘시민의 일원’으로 수용하지 않으려는 사회적 분위기도 문제다.》

▽한국행 ‘초특급’ 노선=함북 청진시에 살던 한은희(가명·60)씨는 지난해 여름 탈북한 딸로부터 전갈을 받았다. “중국에 살고 있으니 오라”는 내용이었다. 고향을 떠나기 싫었지만 “돈을 많이 벌었다”는 말에 흔들려 ‘잠시 여행하는 셈 치자’며 몰래 두만강을 건넜다.

한씨는 옌지(延吉)에 도착한 뒤 딸이 중국이 아니라 한국에서 산다는 사실을 알았다. 딸과 전화통화하며 “미쳤다”고 야단을 치긴 했으나 결국 딸의 호소에 마음을 돌려 한국행을 결심했다. 1000만원을 받은 브로커는 한씨를 조선족으로 위장시키기 위해 위조여권을 건네줬다. 한씨는 창춘(長春)으로 이동해 서울 직항편을 타고 인천공항으로 입국했다. 청진을 떠나 한국에 도착하는 데 걸린 기간은 불과 23일이었다.

최근 탈북은 루트가 다양화됐을 뿐 아니라 탈북∼중간지∼한국행의 기간이 갈수록 단축되는 추세다. 성공 확률이 높은 루트가 ‘개발’되면서 중간체류 기간이 대폭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올해 초 입국해 탈북자 정착 지원시설인 하나원에서 교육받은 탈북자 A씨의 경우에는 탈북에서 입국까지 불과 8일밖에 걸리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는 5000명이 넘는 국내 탈북자 가운데 최단기록. 관계자들조차 ‘초특급 탈북’에 놀라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면밀히 조사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한 관계자는 “최근 들어 일부 탈북자의 한국행 과정은 마치 ‘해외 배낭여행’을 보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실제 통계에서도 한국행 ‘탈북열차’의 속도는 갈수록 빨라지고 있다. 지난해 상반기 입국한 탈북자 503명 중 중국 체류기간이 1년 미만인 사람은 전체의 12.1%(61명). 그러나 올 상반기 입국자 760명 가운데 1년 미만 중국 체류자는 38%로 껑충 뛰었다.

올 4월에는 탈북 후 6개월 만에 입국한 비율이 32%나 됐다. 5월 입국자 80명 중 이 비율은 25%(20명)로 여전히 높다. 이들 가운데는 불과 1개월 만에 ‘초특급’으로 입국한 사람도 6명이나 됐다.

▽정착은 완행=북한의 유명대학 화학과를 졸업하고 전문직 공무원으로 일했던 전모씨(30·여)는 올 3월 입국해 전공에 맞는 직업을 구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현재 서울 동대문의 한 식당에서 음식을 나르고 있는 그는 우울증세를 보이고 있다.

98년 입국한 이모씨(38)는 정수기 판매업체의 영업직원으로 일하며 나름대로 한국사회에 안착했다. 그러나 사귀던 여자친구와 결혼하기 위해 ‘미래의 장인’을 찾아갔다가 매몰차게 거절당했다. “자기 혼자 살겠다고 (가족을 버리고) 온 사람에게 딸을 줄 수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꿈에 부풀어 한국에 온 탈북자들은 경제적인 측면 외에도 사회적 이질감과 거리감을 여전히 좁히지 못해 고민하고 있다.

탈북자 552명의 의식을 조사한 연세대 의대 전우택 교수(정신과)는 “탈북자들은 처음 입국할 때는 자신감에 차 있고, 설사 잘 살지 못하더라도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성공 가능성을 회의하고 있으며 무시와 차별로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 교수는 “입국한 지 오래될수록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고민하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사회 정착의 1차 책임을 갖고 있는 탈북자들에게도 문제는 있다.

지난해 통일연구원이 탈북자 78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이들의 취업률은 39.8%, 월 평균소득은 74만원이었다.

그러나 한 탈북자는 “조사결과는 실제상황과 다르다”며 “상당수 탈북자들이 정부지원금을 받기 위해 취업을 하지 못했다고 답변한다”고 지적했다. 실제 일부 탈북자들은 “남한사람들이 기피하는 3D직업을 왜 우리가 해야 하느냐”고 되묻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40대 탈북자 K씨는 지난해 “남한사람과 똑같은 일을 했는데 왜 월급을 80만원밖에 주지 않느냐”고 항의하며 서울 영등포시장의 도매상 배달 일을 박차고 나오기도 했다.

▽통합으로 가는 길=문제는 탈북의 동기와 탈북자의 구성이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원웅 관동대 교수(북한학과)는 “탈북자의 구성과 탈북 동기가 과거와 달리 ‘이주민’의 개념으로 바뀌고 있다”고 지적했다.

체제에 대한 불만으로 한국행을 선택한 ‘귀순’이나, 입에 풀칠하기 위한 ‘생계형 탈북’을 지나 이제는 더 나은 삶을 찾아 한국으로 ‘대량 이주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이다.

따라서 탈북자들도 기본 생계에 만족하지 않고, 그 이상을 기대하고 있다. 윤여상 경남대 교수는 “이들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서는 정부 차원의 지원정책으로는 한계가 있다”면서 “사회 전체가 탈북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체제로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주성하기자 zsh7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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