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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광장/방형남칼럼]김정일 위원장은 웃고 있다

입력 | 2004-07-28 19:00:00


1970년대 우리 군은 대(對)간첩작전을 하며 중대한 실수를 했다. 북한이 보낸 간첩을 잡기 위해 벌건 대낮에 부대이동을 한 것이다. 고지대에서 남한군의 동향을 관측한 북한군은 간첩에게 요리조리 빠져나갈 수 있는 도주로를 알려 주었다. 우리 군은 번번이 간첩 소탕에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뒤늦게 잘못을 알게 된 군은 야간이동과 작전으로 전략을 바꿨다. 병사들은 야간훈련을 받느라 고생이 심했지만 대간첩작전의 성공률은 쑥 올라갔다.

서해 북방한계선(NLL) 파문은 북한군에 농락당했던 30년 전의 씁쓸한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때는 전방의 산속에서 벌어지는 대간첩작전에 국한됐지만 지금은 나라의 온갖 움직임이 북한에 노출돼 있다. 북한에 이용당할 여지가 그만큼 확대된 것이다.

▼북한 술책에 나라 흔들려서야 ▼

북한은 경비정 한 척을 보내 14분간 NLL을 침범하는 전략으로 남한 전체를 흔들었다. 북한은 NLL 침범에 그치지 않고 남한에서 보고 누락 문제가 불거지자 뒤늦게 송신 사실을 공개하는 2단계 작전을 구사했다. 송신시간을 실제보다 10분 앞당기는 술책까지 동원했다.

남한의 움직임을 지켜보다 유리한 시점에 교란작전을 펴 혼란을 극대화하려는 북한의 작전은 적중했다. 정부의 자중지란(自中之亂)까지 겹쳐 국방부 장관이 바뀌고 합참 정보본부장이 옷을 벗고 정부와 군, 군과 국민, 여당과 야당이 얽혀서 손가락질을 하는 신세가 됐다.

고려시대 서희 장군은 세 치 혀로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 영웅이다. 우리는 싸우지도 않고 거란의 80만 대군을 물러가게 한 뒤 강동 6주를 얻은 서희 장군의 승리를 자랑스러운 역사로 기억한다. 북한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총 한 방 쏘지 않고 남한을 뒤흔든 북한의 분위기를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북한 군부의 누군가는 영웅이 되었을 것이다.

시사주간지 타임은 6월 21일자 표지에 환하게 웃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사진을 싣고 ‘왜 이 사람이 웃고 있을까’라는 설명을 달았다. 북한과 관계개선을 하려는 주변국의 움직임과 친북 성향이 점점 강해지는 남한사회 동향 때문에 김 위원장이 웃지 않을 수 없다는 요지의 기사였다. 타임지의 선견지명이 놀랍다. 한 달이 지난 지금 김 위원장은 혼란에 빠진 남한을 생각하며 소리 내어 웃고 있을 것이다.

NLL 불씨가 꺼진 것도 아니다. 27일은 정전협정 조인 51주년이었다. 북한은 14일, 21일 NLL을 침범한 데 이어 26일에는 NLL 남쪽 우리 해역에 있는 해군 고속정을 향해 ‘군사분계선을 넘었으니 항로를 변경해 내려가라’는 억지 요구까지 했다. 정전협정 기념일을 맞아 계속되고 있는 북한의 노골적인 NLL 무시 작전이다.

북한의 카드는 NLL 이외에도 많다. 남파 간첩을 민주화에 기여한 유공자로 만든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 미국 하원이 채택한 북한인권법안에 대한 반감 등 갈수록 유리하게 바뀌는 남한 사회의 동향도 북한에는 호재다. 여성 응원단만 보내도 남한이 뒤집어지는 것을 잘 알고 있는 북한이 마음만 먹는다면 무슨 전략인들 활용하지 못하겠는가.

▼군과 국방부 氣부터 살리자 ▼

앞으로가 문제다. 이번 파문으로 힘을 잃은 국방부와 군을 살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북한에 데고 청와대의 질책까지 받았으니 조심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또다시 함포 경고사격을 할 상황이 오면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어떻게 할까요?”라며 청와대의 처분만 기다리는 불상사는 제발 발생하지 않기를 바란다.

국방부가 흔들리고 군인이 몸을 사리면 누가 나라를 지키는가. 무기력한 정부가 목표가 아니라면 군과 국방부의 기부터 살려야 한다. 그리고 이제라도 북한을 제대로 살피자. 북한을 정확히 알아야 대비도 제대로 할 수 있다.

방형남논설위원 hnb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