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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 아닌 국민’ 는다…신용불량자, 주민등록 말소

입력 | 2004-07-28 19:10:00


경기불황이 이어지면서 빚 때문에 주민등록이 말소된 ‘무적(無籍) 시민’이 늘어나고 있다.

대부분 빚에 몰려 행방을 감춘 후 신용카드사, 은행 등 채권자가 제기한 ‘채무자 거주지 확인요구’의 행정처리 결과 직권말소 당한 것. 심지어 빚 독촉에 시달리다 못해 남은 가족이 채무자의 주민등록을 말소시키기도 한다.

지난해의 경우 전체 말소 건수가 31만여건에 이르렀으며 이 중 직권말소만 26만여건이나 됐다. 신용불량자 370만명 시대의 그늘인 셈이다.

▽주민등록이 없다=서울 서대문구 K씨(33)는 최근 주민등록을 말소당했다. K씨는 카드 빚 1500여만원을 제때 갚지 못해 신용카드사의 빚 독촉을 피해 다녔다.

그러자 카드회사는 “K씨가 주민등록상 거주지에 실제 살고 있느냐”며 거주 사실 확인을 요청하는 민원을 동사무소에 제기했고, 동사무소는 조사를 거쳐 K씨의 부재 사실을 확인하고 주민등록을 말소시켰다. K씨는 “서류상으로 유령이 된 셈”이라며 씁쓸해했다.

O씨(28·여·서울 은평구)는 이달 초 동사무소에 어머니가 집을 나가 행방불명됐다며 주민등록 말소 신청을 했다. “어머니가 은행에서 빌린 돈과 휴대전화 연체료를 갚으라”는 채권자의 독촉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

은평구 녹번동사무소 관계자는 “요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채권자로부터 말소신청이 들어온다”며 “신청에 따라 조사해 이뤄지는 직권말소가 가장 많다”고 말했다.

노원구 상계9동사무소 관계자는 “예전엔 가족의 신고에 따른 말소신청은 드물었는데 최근에는 한 달에 보통 한두 건, 많을 땐 5건까지 받아본 적이 있다”고 밝혔다.

영등포구 신길1동사무소 관계자는 “빚 독촉을 피하려고 이사를 간 뒤 전입신고를 하지 않아 말소되거나 본인이 직접 와 말소신청을 하는 사례도 있다”고 말했다.

▽채권자 VS 채무자=은행, 카드회사 등 채권자가 채무자의 주민등록 말소를 신청하는 것은 재산권 관련 소송을 진행하기 위해서다.

채권자의 법적 조치에 대해 법원이 피신청인이나 피고에게 공시를 송달해야 하는데, 빚진 사람이 도망가거나 계속 자리를 피하기 때문에 송달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다는 것. K카드사의 한 추심담당자는 “이런 경우 법원이 채권회수 송사의 제출서류에 피신청인이나 피고의 주민등록이 말소됐다는 확인서를 첨부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한 카드사 관계자는 “채무추심 관련 우편물이 여러 차례 반송되는 경우 확인차 조사를 나가보면 채무자가 버젓이 살고 있으면서도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많다”며 “채권자를 압박하기 위한 방법으로 주민등록 말소 신청을 하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주민등록이 말소되면=무적자들은 건강보험, 국민기초생활보장, 국민연금 대상에서 제외된다. 금융거래도 제한을 받으며 투표권도 행사할 수 없다.

은평구 C병원 전모 주임(36)은 “병원을 찾았다가 건강보험 조회과정에서 주민등록이 말소됐다는 것을 알게 되는 신용불량자들도 더러 봤다”고 말했다.

주민등록 말소 후 최고 10만원의 과태료만 내면 재등록할 수 있지만 채무자들은 빚 독촉을 피하려고 재등록을 외면하는 실정이다.

조이영기자 lych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