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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칼럼]김영민/과거소재 영화 붐은 병적징후

입력 | 2004-07-30 18:55:00


영화 ‘서편제’(1993)가 국민적 인기를 모은 이래로, ‘반칙왕’(1999), ‘친구’(2001), ‘실미도’(2003)를 거쳐 ‘말죽거리 잔혹사’(2004)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노스탤지어 영화’로 분류되는 상품들이 봇물 터지듯 나오고 있다.

소비자들이 꾀면서 돈이 돌고, 각종 진기록이 홍보되면서 덤으로 할리우드의 영화제국주의적 우산에서 점차 벗어나는 눈치지만 실은 이 현란한 풍경 탓에 은폐되는 사정이 한둘이 아니다.

그중 하나가 인문적 대화의 상상력이 고갈되거나 정식화(定式化), 혹은 피상화되는 것이다. ‘대화적 상상력’의 이론가인 미하일 바흐친은 “최초의 말도 최후의 말도 없으며 대화의 길은 끝이 없다”고 했지만, 영화나 TV 주변을 습관처럼 회전하는 언중(言衆)의 대화는 그 매체들이 획정한 주제와 풍경 속으로 어김없이 회귀하며, 그 대화의 처음과 끝은 스크린의 두께만큼이나 뻔하다.

한때 상상력의 보고(寶庫)로 예찬되었던 영상 매체들은 이제 상상력의 독재자가 되어 중언부언 어제의 말을 쉼 없이 반복한다. ‘의사소통의 구조가 뒤틀린 탓에 생활세계가 식민화되었다’는 흔한 지적은 각종 매체의 주변에서 쉽게 확인된다.

노스탤지어가 개인의 감상을 넘어 한 사회의 문화적 기운에 넓게 침윤했을 때, 그것은 징후일 뿐 아니라 징조다. 마땅히 비평가들은 현상의 번란한 ‘묘사’에서 벗어나 문화사회적 ‘서사’의 성격과 그 향방을 헤아리고 따져야 할 것이다. 프레드릭 제임슨도 “노스탤지어 영화가 동시대적 영화들을 식민화하는 것은 징후적”이라고 했는데, 요컨대 이것은 “시간과 역사를 제대로 다룰 수 없는 소비자본주의 사회의 병리적 징후”인 것이다.

이론가들은 시간관이나 자기정체성이 언어와 서사의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그렇다면 노스탤지어의 문화적 징후는 사회역사적 서사가 막혔거나 퇴행한다는 징조다. 이를테면, 상업주의와 끈끈히 결탁한 노스탤지어 영화 붐은 공간과 물상에 탐닉하는 소비자본주의의 정신분열병적 태도와 닮았다. 다만 정신분열증은 역사가 없는 현재에 몰입하지만, 노스탤지어는 사사(私事)화된 과거에 집착하는 차이를 보일 뿐이다.

간단히, ‘과거를 본받아 미래를 연다(법고창신·法古創新)’는 생활실천의 진면목이 심각하게 훼손된 사회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 훼손이 현금 최고의 문화산업인 영화에서 노스탤지어의 모습으로 고착되어 드러난다는 것이다.

우리의 근대화는 과거의 ‘청산’ 위에서 급조된 농축, 과잉의 것이었고, 천민·졸부 자본주의라는 별칭처럼 우리의 자본주의 역시 이 탈(脫)역사의 근대화를 물질적으로 보상하는 성격이 짙었다. 이에 따라 ‘물질의 풍요와 정신의 소외’라는 근대의 이중성이 우리 사회에서는 보다 극명하고 첨예하게 가시화됐고, 노스탤지어 영화 붐은 이 틈을 타고 든 비역사적 역사물인 것이다.

한 사회의 건강은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집단적 시선의 고른 분배로 나타난다. 대조적으로, 신화적 사고는 제의(祭儀)를 통해 현재를 망각하고 과거로 복귀한다. 창세론에 집착하는 신화나 종말론에 몰두하는 종교는 노스탤지어와 판타지를 동력으로 움직이는 비역사적 체계다. 노스탤지어는 영상문화산업을 매개로 현대의 신화가 된다. 역사를 잃은 자본주의 사회의 퇴행적 감상이 호출한 신화.

김영민 한일장신대 교수·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