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우리당 유시민(柳時敏) 의원이 1일 최근 당 상황과 관련, "우리당이 '새로운 종의 정당'이 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어쩌면 '도로 옛날당'이 될 지도 모르겠다"고 주장했다. 유 의원은 지난달 30일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글에서 "정당 혁명을 위해 정치에 입문했는데 잘 풀리지가 않는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또 "내가 바라는 것은 국회의원과 더불어 평당원들도 모두 주인 노릇을 하는 참여민주주의 정당인데 이를 우리당 안에서 실현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며 회의감을 표시했다.
이와 함께 유 의원은 최근 각종 TV 토론에 나가지 않는 등 언론과 접촉을 피한 것에 대해 "정치에 대해서 별로 말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제법 심한 '정치적 우울증'에 빠져 있는 것 같다"고 진단하기도 했다. 그는 최근 맡고 있던 당 제4정조위원장을 그만뒀다.
다음은 유시민 의원의 글 전문.
날씨가 무덥습니다. 어떻게들 견디고 계신지요. 산으로 바다로 휴가를 떠나신 분들도 있겠지만, 살림살이가 어려워 그냥 선 자리에 머무르는 분들도 많을 것 같습니다. 어디서 휴가를 보내든 이 무더위를 씩씩하게 견뎌내시기 바랍니다.
한 동안 아침편지를 쓰지 않았습니다. 지난 한 달 동안 온갖 일들이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런 문제들에 대한 견해를 물었지만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기자들이 아는 핸드폰 번호를 없애 버렸습니다. 텔레비전 토론회도 나가지 않았고 인터뷰도 거의 하지 않았습니다. 되도록 카메라가 있는 곳에는 가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왜냐구요? 어설픈 자가진단에 따르면, 아무래도 저는 지금 '정치적 우울증'에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정치에 대해서 별로 말을 하고 싶지 않을 정도이니 제법 심한 우울증입니다.
제가 너무 예민한 것일까요? 지나친 욕심 때문일까요? 원래 성격이 모나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정당혁명'을 하려고 정치에 입문했습니다. 그런데 잘 풀리지가 않습니다. 너무 높은 목표를 설정한 탓인지도 모르겠으나, 달리 보면 저에게 많은 분들과 함께 협력하는 능력이 부족한 탓일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열린우리당이 '새로운 종의 정당'이 될 수 있다고 믿었는데, 어쩌면 '도로옛날당'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국회의원과 더불어 평당원들도 모두 주인 노릇을 하는 참여민주주의 정당인데, 이 바램을 열린우리당 안에서 실현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서지를 않습니다.
낙심한 나머지 골방에 틀어박힌 저를, 누군가 이런 말로 위로해 주더군요. "당신 생각이 옳다면 그것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1년이 걸리든 10년이 걸리든. 그러나 당신 생각이 옳지 않다면 그것은 어차피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속 끓이지 마라." 그렇습니다. 될 일은 어떻게 해도 되고, 안될 일은 아무리 용을 써도 안되는 게 맞습니다. 하지만 될 일이 되는 과정을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어차피 될 일을 가지고 안달복달 속을 끓이고 발을 구른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아마 그 가운데 하나인 것 같습니다.
휴가철입니다. 국회도 정치도 짧은 방학을 맞았습니다. 당분간 계속 골방에 앉아 고민하겠습니다. 더위가 한 풀 꺾이면 다시 기운이 나겠죠. 열린우리당 경기도당 위원장으로서 할 일을 해야 하고, 또 제가 바라는 정당혁명을 열린우리당 안에서 실현하기 위해 만드는 참여정치연구회를 대중적인 조직으로 발전시켜야 하니까, 힘을 내야만 합니다.
제 홈페이지 게시판이 욕설로 가득합니다. 날씨는 덥고 살림살이는 어렵고, 모두가 힘든 시기입니다. 낙담한 누군가에게 힘이 되는 말들을 남겨주시라는 부탁을 드립니다. 여러분 건강하십시오. 저에게 힘을 주는 도종환 시인의 '가지 않을 수 없던 길'을 선사해 드립니다. 여러분께도 힘이 되기 바랍니다.
-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번쯤은 꼭 다시 걸어 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파여 있는 길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텅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디지털뉴스팀· 이승헌기자 ddr@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