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재 금융감독위원장이 지난달 31일 오전 전격적으로 사의를 표명한 뒤 집무실을 나서고 있다. 이 위원장은 이날 사의 표명 후 “당분간 지방에 가 있겠다”면서 서울을 떠났다. - 연합
평소 말을 아끼는 스타일인 이정재(李晶載) 금융감독위원장은 사의를 표명한 지난달 31일 “여러 가지 상황을 감안해 물러날 때”라는 말 외에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서는 “지금 상황 복잡한 것은 기자들이 더 잘 알지 않느냐”고 말했다. 금융감독 체계 개편과 관련해 금융감독원 노조에 대한 섭섭한 심경도 비쳤다.
최근 이 위원장을 가장 곤혹스럽게 한 것은 금융감독 체계 개편 문제였다. 청와대가 금감위의 기능은 강화하고 금감원 권한은 축소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려지면서 금감위와 금감원이 심각한 갈등을 빚어 왔기 때문이다.
특히 대통령 자문 정부혁신지방분권위원회가 금감위 중심의 감독체계 개편 방안을 청와대에 보고했다는 보도(본보 7월 30일자 A1·10면 참조)가 나온 직후 금감원은 이를 저지하기 위한 ‘총력 투쟁’을 선언했다.
이로 인해 금감위와 금감원의 수장(首長)을 겸하고 있는 이 위원장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몰렸다.
신용카드 감사 결과도 이 위원장을 힘들게 했다. 금감원 직원들은 지난달 16일 감사원의 신용카드 특별감사 결과 발표 이후 전윤철(田允喆) 감사원장을 명예훼손혐의로 고소했다.
하지만 이번 사의 표명에는 이 밖에 다른 변수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적지 않다.
이 위원장은 평소 “내 임기는 하루다. 오전 8시에 출근해 단두대에 목을 내놓았다가 오후 7시 퇴근 때 거둬들인다”고 입버릇처럼 말할 정도로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금융 감독체계 개편이라는 중요한 상황을 앞두고 갑작스레 사의를 표명한 것은 석연치 않다.
이와 관련해 금감원의 한 관계자는 “정부혁신지방분권위가 금감위 중심의 금융감독체계 개편 방향을 청와대에 보고하면서 (정부 방안을 밀어붙일) ‘추진력 있는’ 위원장이 필요하다고 건의한 것으로 안다”며 “이 위원장의 이번 사의 표명은 이에 대한 반발 성격도 있는 것 같다”고 전했다.
정통 경제관료 출신인 이 위원장이 현 정권과 ‘코드’가 그리 맞지 않아 적잖은 마음고생을 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온다.
작년 말과 올해 초 LG카드 사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도 정권 내 일부 인사들과 다소 시각차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위원장은 원칙에 입각해 문제를 풀어나가려 했으나 해결이 늦어지자 총선을 앞둔 정권 안팎에서 “금감위원장은 뭘 하고 있나”라는 비판이 제기됐다는 후문이다.
한편 이 위원장의 사의 표명으로 정부가 마련한 금감위 중심의 금융감독체계 개편안은 일단 탄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가 좀 더 ‘추진력’을 갖춘 금감위원장을 새로 임명해 감독체계 개편에 가속도를 낼 것으로 금감원에서는 보고 있다. 다만 금감원의 반발이 격렬한 만큼 가을 정기국회에서 최종안이 통과될 때까지는 진통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배극인기자 bae2150@donga.com
▼이정재 금융감독위원장 취임에서 사의 표명까지▼
△2003년 3월=이정재 금감위원장 취임(임기 3년)
△2003년 11월=LG카드 유동성 위기 발생
△2004년 7월 16일=감사원, 신용카드 특감결과 발표 및 금융감독 체계 개편안 발표. 감사원은 이 과정에서 금감원이 법령 근거 없이 국민의 권리·의무와 관련된 업무를 하고 있다고 지적
△2004년 7월 20일=금감원 직원, 전윤철 감사원장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
△2004년 7월 27일=민주노동당, 금감원의 LG카드 건전성 감독 소홀과 관련해 이정재 금감원장을 직무유기 혐의로 검찰에 고발
△2004년 7월 30일=본보, 정부지방분권혁신위원회가 마련한 금감위 중심의 금융감독 체계 개편안 보도
△2004년 7월 30일=금감원 노조위원장 삭발 및 직원비상총회 개최, 노무현 대통령 앞으로 전 직원 탄원서 제출
△2004년 7월 31일=이정재 위원장 사의 표명